지난 10월 12일(토) 미주성시화운동본부에서 주최한 제9회 설교 페스티벌의 대상은 중국 요녕성 단동(접경)에서 북한 고아들을 먹일 2,000개의 빵을 보내는 사역을 해온 류명순 선교사(월드미션대학교)에게 돌아갔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흘러가게 하라”(고후 12:9-10)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북한 간부가 빵공장에 데리고 온, 평양에서 가장 용하다고 소문난 무당과의 영적 대결을 완벽한 그리스도의 승리로 이끌어 낸 체험을 간증해, 심사위원 및 참석자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는, 펜데믹 이후 중국의 제재가 엄격해져 단동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지만, 민통선 내 해마루촌 교회에서 북한을 위한 특수 사역자를 기르는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류 선교사는, 이번 설교 페스티벌을 위해 미국에 오는 대신, 설교 동영상을 찍어 보낼 수도 있었지만 북한 사역을 알리기 위해 미국에 왔다고 말했다.

“이번에 졸업을 했는데, 북한에 대해 나눌 기회가 많이 없었다. 북한은 아예 먹을 게 없어 인육까지 먹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알리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미국에 오게 된 것도 북한을 향한 이 간절한 마음을 나누기 위해서이다.”

출국 전 잠시 시간을 내 기독일보 사무실을 방문해 준 류 선교사는 북한 선교사로 부름받게 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류명순 목사
(Photo : 기독일보 ) 류명순 목사는 중국 단동에서 고아들을 돌보며 북한 고아들에게 빵 2천개를 매일 만들어 보냈다.

파주에는 민통선 내에 마을이 세 개 있다. 대성동, 통일촌, 해마루촌 마을이 그것이다. ‘자유의 마을’이라 불리는 ‘대성동’은 비무장지대(DMZ) 내에 있는 마을로, 6.25 전쟁 당시 피난 갔던 주민 일부가 귀향하며 마을이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높이 99.8m에 이르는 게양대에는 가로 18m ‧ 세로 12m의 대형 태극기가, 이 마을로부터 2km가 채 되지 않는 곳에 북한의 기정동 마을에는 높이 158m 게양대에 인공기가 휘날리고 있다. 통일촌은 실향민과 제대군인들을 주민으로, 투철한 반공의식 아래 건립되었고 해마루촌은 고(故) 김대중 대통령 때 1998년 햇볕정책에 따라 실향민 1세대와 연고자를 주민으로 조성됐다.

해비타트 운동이 한창일 무렵, 중보기도팀에서 3년 반 정도 훈련을 받고 있던 류명순 선교사는, ‘DMZ 안으로 들어라가’는 지시를 받고 그곳에 들어갔다.

“카터 대통령의 집짓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2008년에 중비기도팀에서 계속 DMZ안에 들어라가라는 지시를 받고 아는 분을 통해 들어갔다. 한 권사님이 저를 보시더니, 북한 선교를 위해 기도하냐고 물으셨다. 그 선교사님의 도움으로 집 한 채를 배정받고 주민증을 받게 되었다. 그곳 마을회관에 '북한 선교 센터' 간판을 걸고 선교를 시작했다.”

이 선교센터의 설립에 이어, 하나님께서는 류 선교사의 발걸음을 북한 신의주 접경 도시인 중국 단동(요녕성)으로 이끄셨다.

당시, 류 선교사는 주안장로교회 청년들과 강화도 고아원을 섬기는 사역을 하고 있었는데 이 청년들 중 한 쌍이 결혼을 하게 된다. 이 신혼 부부는 중국 단동으로 신혼여행을 가는데, 신혼여행에 류 선교사가 동행해 주길 끈질기게 설득했다. 한달이 넘는 그들의 설득에 ‘사진만 찍어주고 오자’는 마음으로 단동 땅을 밟은 류 선교사에게는 전혀 뜻밖의 사건들이 이어졌다.

신혼여행이라고 단동에 갔는데, 관광지라고는 6.25 폭격 때 끊어진 단교밖에 없었다. 그나마 관광지라고, 거기서 사진을 찍어주려고 하는데 북한군 두 명이 다가왔다.

“남조선에서 온 것 아닌가?”

류 선교사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잘못하면 ‘납치당하겠다’는 생각에, 청년부부에게 도망가라는 신호를 보낸 후, 류 선교사도 도망쳤다. 숙소로 돌아온 그는 접경지대에 온누리교회가 있다는 게 생각나 얼른 단동 온누리교회로 갔다. 겁에 질려 있던 그는 교회에 들어서자 펑펑 울며 기도했다.

"하나님, 저를 이렇게 순교 시키려고 그동안 기도훈련 시키신 것입니까?"

그런데 이상한 기도가 흘러나왔다.

‘주님, 저를 단동을 밟게 한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예배드립시다'라는 이야기를 듣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 말이 끝나자 마자 한 남자가 헐레벌떡 본당으로 뛰어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예배드립시다'라며 새신자실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예배를 드렸다.

알고보니, ‘예배드립시다’라고 외친 그 남자는 6개월 전 단동에 온 선교사였고, 연길에 GMS 선교사 모임이 있어서 13시간 기차를 타고 갔다가,‘교회에 가라’는 마음이 강력하게 들어, 모임을 뒤로하고 택시를 타고, 교회로 뛰어온 거였다.

그렇게 단동 땅을 밟은 것이 하나님 뜻인 것을 확정받은 후, ‘왜 나를 여기에 보내셨나’를 알고 싶은 것이 당연한 수순. 그 답을 알고 싶어 압록강을 바라보며, 북한 군인을 마주쳤던 그 길을 다시 걸었다. 그리고 거기에 또 다른 퍼즐 한 조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교와 교회 중간 즈음에 쌍둥이 빌딩이 있다. 그런데 갑자기 기도 중에 숫자 '1504'가 보였고 '올라가라'는 마음이 강력히 들었다. 그때 마침 교회에서 봤던 전도사님이 자전거를 타고 제 앞을 지나가셔서 그분께 통역을 부탁했다. 건물에 들어가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지만 IC카드가 없어 작동이 안됐다. 포기하고 나오려는데, 어떤 남자가 15층을 눌렀다. 그래서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으로 올라왔다. 그 남자는 한쪽 사무실로 들어갔고, 다른 쪽 한 사무실에서 북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슬며시 안을 들여다 봤는데,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북한 간첩이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빨리 도망가려고 돌아서는데, 제 머리채를 홱 낚아채더니 쇼파에 저를 앉으라고 했다."

그 여성은 여전히 통화를 이어가고 있었고, 류 선교사 귀에 "내가 어떻게 빵을 보내냐!"라는 말이 생생하게 들렸다.

전화를 끊은 그 여성은, ‘여권을 내놓으라’고 했고, 류 선교사는 ‘저는 목사도 아니고 그냥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보내주세요. 제가 실수로 잘못 들어왔습니다’라며 사정을 했지만, 그는 류 선교사의 쌕을 낚아 채, 여권을 꺼내 페이지를 넘겼다.

“전화 통화 중, '내가 어떻게 빵을 보내냐!'라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탁 끊더니, 저에게 여권 내놔, 이랬다. 여권은 못 드립니다. 저는 목사도 아니고 그냥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보내주세요. 완전히 사정하듯 했다. 안내놓으니까 제 쌕을 낙아채서 여권을 끄집어내서 페이지를 넘기더니 중국 비자가 처음 찍힌 것을 보더라. 진짜 처음인가? 진짜 처음입니다. 그러니 바로 돌려주더라. 어떻게 이 자리에 오게 되었나? 잘못 왔습니다. 전도사를 보더니 알아보셨다. 전도사님과 서로 아는 분이셨다.”

"제가 통화 중에 들은 이야기가 있다. ‘내가 어떻게 빵을 만드나.’ 온누리교회와 협력해서 북한 신의주 고아원에 밀가루와 설탕을 보내주는 일을 하는 분이셨다. 그런데 북한에 석탄이 없어서 못 만드니까 아예 빵을 만들어 보내달라, 중고등학생까지 먹여 달라는 요청을 받은 거였다. 그런데 그때 제가 97년도에 제과제빵 자격증을 딴 것을 가지고 갔다. 그 여성에게, ‘저는 빵 만들 줄 아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며 자격증 두 개를 딱 내밀었다. 진짜 빵 기술잔가? 네, 저는 빵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러더니 그분과 단 둘이 얘기를 하게 되었다. 류 선생 믿을 수 있나? 모니터 앞에 저를 앉으라고 하더니 화면을 켜줬다. 그 앞에 앉았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먹을 것이 없어 고통받는 신의주 어린이들 사진과 영상이었다. 서글픔이 아니라 제가 소녀가장이었다. 펑펑 울면서 오열했다. 울고 있는 저에게, 그분이 ‘나는 북한 고아다’라고 하셨다. ‘저는 남한 고아입니다.’ ‘이제 우리 정치 개념 빼고 고아들을 먹여보자. 세계 어린이 대사로 증명을 받았다. 나는 어린이들을 먹여야 돼.’”

북한 여성은 류 선교사에게 빵공장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이후 류 선교사는 빵공장에서 한족, 한국, 조선족 등 다문화 청소년 아이 30명 한 명 한 명을 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으로 돌보며 북한으로 날마다 2,000개 빵을 보내는 사역을 펜데믹 직전까지 지속했다. 24시간 함께 하며, 공동 숙소가 있어서 매일 선교, 기도, 봉사, 북한에 물자를 보내는 일을 했다.

류명순 목사
(Photo : YMK) 류명순 목사는 중국 단동 빵공장에서 다문화 청소년들과 함께 매일 빵 2천 개를 만들어 북한 고아원에 보냈다.
류명순 목사
(Photo : YMK) 류명순 목사는 단동 빵공장에서 매일 빵 2천개를 만들어 북한 고아원에 보냈다.
류명순 목사
(Photo : 기독일보 ) 류명순 목사가 기도하고 있다.

지금은 단동에 갈 수 없게 되어 민통선 안, 파주시 해마루 촌 교회에서 여전히 북한 복음화를 위한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다행히 단동에서 빵공장을 하며 돌본 30명의 아이들, 이제는 청년이 된 그들을 한국으로 데리고 와 신학교육을 시키고, 각자 독립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있다. 물론, 류 선교사의 북한을 위한 사역에 마음과 뜻을 함께 해, 그의 사역을 돕는 청년들도 있다.

최근 류 선교사와 그의 남편인 유문수 선교사(YMK, Youth Mission with the Kids 북한선교 비영리단체 대표)는 제주에 개척했다. 단동에서 북한만 섬겼던 류 선교사는 이제 한반도와 한국 디아스포라를 섬기는 사역으로 확장했다. 한국 디아스포라들에게 두만강, 단동 지역에 비전트립을 통해 북한을 향한 사역의 필요성을 알리고, 통일에 대한 비전을 깨우기 위해 아웃리치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6월 월드미션대학교를 졸업하면서 목회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세계복음선교연합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류명순 목사와 유문수 목사
(Photo : 기독일보 ) 제9회 설교 페스티벌 대상 수상자인 류명순 목사와 유문수 목사(YMK 대표) 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