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왜 발레를 하니?"
"그냥 기분이 좋아요. 하늘을 나는 새가 된 것처럼요!"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 2000)>라는 영화를 보신 적 있는가? 많은 분들이 보셨으리라 생각한다. 만일 보지 못하셨다면, 이번 기회에 꼭 보기를 추천한다.
영화의 배경은 1980년대 영국 탄광촌 '더럼'이다. 주인공은 이곳에 사는 11살 소년 빌리다.
그는 아버지의 강요로 매일 복싱을 배우러 가는데, 체육관에서 우연히 발레 수업을 보게 된다. 그 후 빌리는 토슈즈를 신은 여학생들 뒤에서 동작을 따라한다.
그에게 재능을 발견한 발레 선생님 윌킨슨 부인은 빌리에게 특별 수업을 해주고 로얄발레학교의 오디션을 보라고 권유한다. 발레는 여자들이나 하는 거라며 반대하는 아버지. 몰래 신나게 춤을 추던 어느 날, 빌리는 불쑥 체육관에 찾아온 아버지와 맞닥뜨리게 되는데....
(스티븐 달드리 감독은 대비되는 구조를 통해 기존 시대 vs 새로운 시대, 경제 vs 예술 등 사회 안에서 서로 다른 이념 충돌과 세대 간의 갈등을 보여준다. <빌리 엘리어트>는 그의 첫 번째 장편영화다. 후에 <디 아워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를 연출했다.)
아버지와 빌리의 갈등뿐 아니라, 영화는 1980년대 초반 영국 광산의 대규모 노동 투쟁을 중요한 배경으로 다루고 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원동력은 석탄 산업이었다. 하지만 경제 발전에 따라 수요가 줄어들자, 신자유주의 대표주자인 마거릿 대처 수상은 국영 탄광촌을 폐쇄시키고 광부들을 해고시킨다.
이에 영국 탄광촌 노동자들은 집단 파업에 돌입하게 된다. 여기서 신경제주의 체계 vs 기존 산업 체계와의 갈등, 정부 vs 민간의 갈등 또한 다루고 있다. 바로 개인의 고민과 사회의 고민을 동시에 보여주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신분사회가 유지되는 영국은 귀족과 평민,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로 나뉜다. 귀족과 부유한 이들, 더더욱 여자들이 하는 발레를 배운다는 것은 노동자인 아버지와 형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남성 중심의 사고를 가진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발레와 대비되고 있는 축구와 복싱이다.
영화는 발레를 하고 싶은 소년의 개인적 고민과 가족의 갈등을 사회 문제와 유기적으로 연결시킨다. 현 시대의 대립과 갈등이 다음 세대의 발전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하며 해결해야 하는지, 보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감독은 지속해서 감상자들에게 기존의 선입견과 편견에 대해 생각하도록 몇 가지 코드를 넣었다(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광부파업, 동성애, 남성과 여성, 복싱과 발레 등).
이는 사안이나 현상 자체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기존의 개념과 이념으로 무장된 사회에서 새로운 개념과 이념으로 찾아오는 시대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선입견과 편견을 깨야 한다는 메시지로 해석하고 싶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 다음 세대들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빌리 엘리어트>, 가족을 통해 사랑 이야기하는 영화
빌리의 재능을 발견하고, 빌리를 위해 동료들을 배신하는 아버지. 파업을 중단하고 탄광에 들어가려는 아버지와 그를 말리려는 형 토니가 광산 앞에서 마주한다.
그리고 자신을 막아서는 토니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어쩌면 빌리는 발레의 천재일지도 몰라. 엄마가 계셨더라면 빌리에게 기회를 주었을 거야."
여기서 우리는 성경적인 관점을 살펴볼 수 있다. 사랑이란 자신이 희생하고 자유를 포기한 만큼, 상대방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흔히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살펴보면,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은 거의 없다.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라는 이야기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행동'이다. 즉 행동을 통해 보여지고 증명된다는 말이다. 사랑은 주는(행동하는) 이가 아니라, 사랑받는 이를 통해 증명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다른 이에게 유익을 주는 행위다.
그렇다면 사랑은 주기만 하기에, 희생과 헌신만을 강요하기에, 힘들기만 할까? 아니다. 수많은 시인들과 학자들이 사랑은 받을 때보다 베풀 때 더 기쁘고 행복하게 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인간만이 태어나서 1년간 전적인 돌봄이 필요하다. 야생의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스스로 걷고 어미젖을 빤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도 스스로 걷고 먹지도 못하기에, 부모가 전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부모들이 자유를 포기한 만큼 자식은 자유롭다. 이것이 사랑의 원리다. 영화는 이를 이야기 해주고 있다.
자신이 그렇게도 혐오했던 배신이지만, 빌리를 사랑하기에 아버지는 자신의 것을 내려놓는다. 덕분에 빌리는 그토록 원하던 발레학교를 가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이 영화가 단지 가족애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빌리의 발레학교 입학은 그의 가족을 넘어 마을의 문제다.
◈<빌리 엘리어트>, 공동체 이야기하는 영화
빌리의 곁엔 재능을 먼저 알아보고 손을 내밀어준 발레 선생님과, 빌리의 꿈을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친구와 마을 사람들이 있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해외 총괄 프로듀서는 이렇게 말했다. "빌리 엘리어트는 한 아이의 이야기뿐 아니라 가족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 아이를 올바로 키우기 위해선 가족만이 아닌 마을의 도움이 필요하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30년 전 우리나라도 대부분의 동네가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골목에 평상을 놓고 늘 동네 사람들이 모여 먹거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가정의 일은 마을 전부의 일로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즐거워했다. 서로 부족함을 메워주고 넉넉함을 나눠주던 시대였다. 세상은 홀로 살아감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것임을 자연스레 배웠던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집들이 오손도손 모여 있던 마을은 아파트라는 성으로 둘러싸인 도시로 변했다. 그 안에 존재하던 교회는 그대로인가? 아니라면 어떻게 변해갔는가?
가족만으로는 한 사람이 올바로 성장할 수 없다. 수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개인주의로 인해 파편화된 이 시대에서는 한 사람이 온전한 인격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현재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살고 있다. 신앙도 사적 영역으로 자리잡아, 공동체적 신앙은 불편하고 어색한 시대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인 성도들이 공동체의 지체로서 서로 섬기며 자라가도록 가르치고 명령했다. 이것이 올바른 원리이기에, 모든 인간 사회는 공동체로 형성되어 있다. 결국 사랑은 관계성을 가진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한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가족과 마을이라는 좋은 공동체가 필요하다. 빌리 곁에 있던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빌리의 꿈을 응원했듯, 이 시대의 교회가 다음 세대로 나아갈 아이들의 내일을 응원하고 품어주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길 소망한다.
더 나아가 빌리의 아버지가 보여준 모습이, 한국교회 기성세대가 이 시대에 보여줘야 할 사랑의 모습은 아닐까?
어느덧 시간은 흐르고, 성인이 된 빌리는 '백조의 호수'라는 발레의 주인공이 된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백조가 된 빌리가 멋지게 점프하며 상승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마치 새처럼 날고 싶어 하던 꼬마 빌리가 꿈을 이루고 완전한 자유를 누리듯이 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에 없던 음성과 자막이 그려졌다.
"사랑은 자신이 희생하고 자유를 포기한 만큼, 상대방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동일한 내용을 인터넷 라디오 방송인 '문화심방'을 통해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팟빵', '팟캐스트', '유튜브'에서 '문화심방'을 검색하셔서 청취해 주세요.
김준영
마커스 미니스트리 설립자 및 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 나의미래공작소 대표, 예학당 설립자 및 주강사이다. 주요 저서로 <나는 마커스 입니다(샘솟는기쁨)>, <고백수업(와엠퍼블)> 등이 있으며, '부르신 곳에서', '주님은 산 같아서', '동행' 등 40여 곡을 작사했다. 숭실대, 명지대, 총신대, 감신대 등 다수 대학교에서 강연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