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켄한인장로교회 이기범 목사
스포켄한인장로교회 이기범 목사

요즘 한국에서는 대통령을 자리에서 내려오라는 군중들의 아우성이 큽니다. 
미국도 한 쪽에서는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거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납니다. 
세상은 이렇게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로 갈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지난 달에는 승진했다고 좋아하던 사람이 이번 달에는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하고, 
몇 달 전에는 아기를 낳았다고 기뻐하던 산모가 요즘은 우울증에 빠져 죽고 싶다고 합니다. 
결혼을 허락하지 않으면 큰 일을 낼 것처럼 열애에 빠졌던 자매가 이제는 더 이상 못살겠다고 
우는 모습을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봅니다. 

성공과 좌절, 승리와 패배, 긍지와 부끄러움이 너무나 빠르게 교차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임직을 받는다고 초대장을 돌리고, 
주위로부터 축하와 축복을 받았던 시간이 한 계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시험에 들었다고
교회를 옮기고 싶다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씁쓸한 심경을 느끼게 됩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기도했고, 무엇을 위하여 헌신했는지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예수님도 사랑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했습니다. 알면서도 모른다는 제자의 거짓말도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만은 죽음의 순간까지 따르겠다는 다짐의 말도, 맹세의 약속도 
이제 물거품이 되는 비통한 현실을 주님도 경험하셔야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순간에도 주님은 사랑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아무도 섭섭하게 여기거나 미워하지 않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13:1) 
끝까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실하지 않은 사람, 
변덕스런 사람, 내 앞에서는 내 편인 것처럼 말하고 돌아서면 나를 욕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끝까지 사랑할 이유가 있을까요? 

베드로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짊어지시고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매를 맞아 상함으로 여러분이 나음을 얻었습니다."(벧전2:21~24)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받은 상처만을 외치는 이 시대에,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기보다는 
침묵하셨습니다. 어려워진 현실을 그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을 대신 지시고 
책임지셨습니다. 주님은 땀을 흘리면서까지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피를 흘리면서까지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셨습니다. 
독기를 품고 죽이라는 군중들을 긍휼한 마음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셔야만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쓰디 쓴 우리의 현실이 기도를 통해서 단물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애물단지같던 인간이 주님의 사랑으로 보물단지같은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근심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간증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도 변질되지 않는 사랑을 끝까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기범 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