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장신대 김인수 총장
(Photo : ) 미주장신대 김인수 총장

대체로 어느 선교지든지 선교 초기에는 의료 사역과 더불어 교육 사업이 대종을 이룬다. 선교 이론 신학자 앤더슨(Rufus Anderson)은 선교지에서는 병원이나 학교를 세워서는 안 되고, 오직 복음 선교만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따라 각 선교지에서 병원과 학교 사역이 폐쇄되고 퇴출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사역은 선교 전초 작업으로 혹은 선교사역 그 자체로 막중한 사명을 감당했다. 한국에서도 이 두 사역은 빼 놓을 수 없는 중요 업무였다. 의료 사역은 병든 사람만을 상대하지만, 교육 사업은 모든 아이들과 문맹 성인도 포함하는 포괄적인 선교이다.

선교사들이 교육 사업을 시작하기 직전 한국에는 이미 근대식 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는 고종 황제의 명에 의해 세관 고문이던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1883년 8월, 개설한 영어학교(English Language School)이다. 그러나 이 학교는 오래 가지 못하고 폐교됐다. 그 후 1886년 미국을 다녀온 민영익이 고종에게 건의하여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세웠다. 고종이 미국 교육행정 관리 이튼(John Eaton) 장군에게 유능한 선생 세 사람을 보내 달라 요청하여, 뉴욕의 유니온신학교 학생 길모어(G. W. Gilmore), 벙커(D. A. Bunker), 헐버트(H. B. Hulbert)가 교사로 내한하여 가르쳤다. 그러나 이들은 학생들의 신학문에 대한 열의 부족과 정부 관리들의 심각한 부정행위를 보고 환멸을 느껴 사직한 후,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따라서 육영공원은 한동안 그 명맥만 유지되다 결국 1894년에 폐교되고 말았다.

초기부터 오늘까지 항구적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근대식 교육 기관은 선교사들에 의해 비롯됐다. 한국에 개신교 선교가 시작됐을 때, 한국의 초등교육 기관은 서당 정도에 불과했다. 서당은 한문이나 가르치는 기초 학교였다. 이나마 양반이나 여유 있는 집 자제들이 아니면 갈 수 없었고 가난한 집 아이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가장 먼저 학교 형태로 교육을 시작한 선교사는 언더우드였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길가에 버려진 고아들을 모아 수용했다. 그는 1886년 2월 정부 허가를 얻어 조그마한 집을 마련하고 고아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고아원은 장로교 선교부가 ‘네비어스(Nevius)정책’을 채택하며, 자립정신을 강조하면서, 문을 닫았다. 한국에 최초로 근대식 학교를 세운 이는 감리교회 의사며 목사인 스크랜톤(William Scraton)의 모친 메리 스크랜톤(Mary Scranton) 여사이다. 그녀가 세운 학교가 바로 이화학당(梨花學堂)이다. 메리는 1885년 6월 한국에 도착하여 서울 정동 감리교 선교 본부 지역에 20여 채의 초가집과 빈터를 구매하여 ‘여자학당’과 ‘부녀원’을 짓기 시작했다. 건물이 1886년 11월에 완성되자, 이곳에 최초의 여학교를 시작했다. 민왕후는 조선왕조 상징 꽃인 배꽃(梨花)을 이 학교 이름으로 지어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 명명했다. 이리하여 우리 민족사에 지울 수 없는 업적을 남긴 무수한 여성 지도자를 배출한 오늘 이화여자 중·고등학교와 대학교가 여기서 출발했다. 따라서 한국 근대 학교의 효시는 이화학당이다. 한국 근대화의 첨병인 학교 중 여자학교가 먼저 세워진 일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한국 여성은 4천년 동안 교육은 고사하고 아들 낳는 기계로 여겨져 왔는데, 이제 비로소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사람 취급을 받는 인간 선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교육 사업에 뜻을 두고 당시 가장 시급히 요청 된 영어교육에 관심을 기울였다. 아펜젤러는 정부에 영어학교 개설을 청원하는 서신을 보냈다. 정부가 이 청원을 허락하자, 1886년 6월, 6명의 학생과 더불어 교육을 시작했다. 여기서 수학한 이들이 후에 공식 통역관이 됐으나 그들은 기독교 교리를 미처 알지 못하고 떠났다.

1887년 국왕 고종은 이 학교 이름을 하사했는데, ‘좋은 일꾼을 많이 길러 내라’는 의미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 지어 주었다. 이 학교는 학생에게 무상으로 교육 시키지 않고 등록금을 받았다. 1888년부터 학교에 자조부(自助部)를 두고 학교를 지키거나 청소를 하는 등의 일을 하게 하여 학자금을 벌어 공부하도록 유도했다. 1894년에는 학교의 규모가 제법 커져 고대사, 물리, 화학, 경제, 성악, 성경 등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고, 등록 학생도 100명이 넘었다. 이 학교가 오늘 배재 중·고등학교와 대학교가 된 것은 주지하는 바다.

한국에 대학이 세워진 것은 평양에서 장·감이 연합하여 세운 숭실대학이다.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베어드(W.M.Baird)가 내한하여 평양에서 시작한 이 학교는 선교부간 협력이 잘 이루어져 연합으로 경영했다. 1906년 10월 이 학교는 ‘평양연합기독대학’(Pyengyang Union Christian College and Academy:한국명 崇實大學)으로 출범했다. 1908년 5월, 두 사람이 졸업하여, 한국에서 최초로 학사학위(College Diploma)를 받는 기록을 남겼다.

이렇게 선교사 주도로 시작된 기독교 학교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과 공헌에 대해 후대의 한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1) 병자와 환자에 대한 과학적 치료 2) 빈민, 고아 등에 대한 조직적인 보호책 3) 미신숭배의 감소 4) 어린이에 대한 존중 5) 조혼과 혼인습속의 개선 6) 여성에 대한 태도와 처우 개선 7) 민주주의 사상과 민족 자존심의 앙양과 재평가 8) 학문과 문학교육의 개선과 한글의 보급 및 일반화 9) 민주적인 인간관계의 발전과 계급차별 타파 10) 사회복지에 대한 새로운 관심 11) 알콜, 마약 등에 대한 계몽 12) 근대 과학적인 학교 교육에 대한 요청과 존중의 증대 등이다. 이런 분석 외에도 음양으로 이들 학교가 한국 교회와 나라에 끼친 공헌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초기 선교 사역은 의료와 교육으로부터 시작됐다. 감리교회 스크랜톤이 “병원은 쟁기로 땅을 갈고, 교육은 씨를 뿌리기 위해 써레로 땅을 고르는 작업을 했다”는 말은 한국 초기 선교에서 의료와 교육 사역의 역할을 적절히 표현한 것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그들이 뿌린 씨앗이 언젠가 열매 맺어 추수할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결코 잊어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 결실은 불원한 장래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