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길 목사
(Photo : ) 김영길 목사

옛날에는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 “자네 부친의 함자(銜字)가 어떻게 되시는가?”하고 물으면, “예, 저의 부친의 함자는 O자(字)와 O자이십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함자라는 말은 “존귀하신 이름”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김 아무개입니다”하고 함부로 부르면, 그는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는 자식이라 여김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 양의 가죽이나 파피루스(갈대 줄기로 만든 종이)에 성경을 옮겨 적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그 때까지 사용하던 먹물을 버리고 새로운 먹물을 사용하여 기록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그가 예수님의 이름을 얼마나 존귀하게 여겼는가를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하여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립보서 1:20-21)

바울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존귀하게 높임을 받으시기를 소원했습니다.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에 흠이 가는 일이라면, 바울은 죽는 한이 있어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존귀하신 이름 때문에 순교를 당하는 것도 바울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존귀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그의 삶을 허투루 살 수가 없습니다. 무가치하게 대충 살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일을 절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안에 계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존귀하다는 말은 곧 예수님 자신이 존귀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존귀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는 그가 어떤 형편에 처했든지 간에 그 자신이 지극히 존귀한 존재가 됩니다. 그 안에 계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마치 귀한 물건을 담아놓은 그릇이 귀한 그릇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사무엘상 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