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유철 목사
(Photo : 기독일보) .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우리의 죄, 아니 나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를 구원하기 위해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하셨는데, 우리들은 예수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이것저것을 함께 붙들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여러 음식을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뷔페식당처럼, 자동으로 원하는 물건을 쉽게 뽑을 수 있는 자동판매기처럼, 십자가의 능력을 가볍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거기에다가 세상은 기독교 신앙을 독선적이라고 비난하며 교회를 세상 방식대로 길들이려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두려운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부끄러워 하기까지 합니다. A.W. 토저가 말한 것처럼 십자가에는 색깔을 칠해서도 안 되고 꽃 장식을 해서도 안 되는데 세상은 온갖 학설로 능력의 십자가를 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자유와 능력의 사람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는 만큼 참 자유와 능력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회복하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확실히 돌이켜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예수님께로,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 대한 연민과 자랑으로부터 예수님을 향해서 똑바로 돌아서는 회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죄의 뿌리는 결국 ‘나’입니다. 교만, 불순종, 욕심, 거짓, 위선, 게으름 등 모든 죄목을 나열해보면 결국 그것들은 ‘나’의 변형일 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범했던 죄의 본능은 멋진 독립선언서를 만들게 했지만 결국 죄와 사망의 종이 되게 할 뿐이었습니다. ‘나’를 중심에 놓는 이기주의로는 회개가 일어나지 않고 선한 역사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자기를 미화시키고 자기의 업적을 우상화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기의 과거는 다 값진 금송아지 한 마리씩은 있었고 국가를 살릴 정도로 대단한 업적을 가졌었노라고 착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 자기를 역사의 중심에 두고 자기를 숭배하는 이기주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를 도둑질하여 죄악으로 덮어두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죄인인 우리들은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는 경험을 해야만 올바른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죽을 때만이 내 안에 계신 예수의 영, 성령님의 놀랍고 신비한 역사가 분명하게 체험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는 경험을 확실하게 이루는 길 중에 하나는 믿음으로 한계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 최고 베테랑 어부의 체면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한 낮에는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을 수 없다는 이성의 한계, 밤새 그물을 던져 피곤하고 지친 육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주님을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즉시로 회개가 나오게 되고 주님을 따르는 새 역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만약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들과 위대한 역사들을 보고 듣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겠습니까? 각자가 뛰어넘어야 할 한계는 다 다르지만 그러나 믿음의 원칙만은 같습니다.

이번 ‘고난주간 특새’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믿음의 기회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