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오 목사.
(Photo : 기독일보) 정진오 목사.

1926년 시인 이상화는《개벽》(開闢)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발표했다. 이 시는 일제 식민지 시절 나라를 빼앗겨 얼어붙어 있을 망정,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어 일으킬 봄을 빼앗아 갈 수는 없다는 몸부림, 억압받는 한국 민족의 강한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

얼마 전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에서 한국은 러시아에 게 사람과 금메달을 빼앗긴 사건이 있었는데, 그 중심에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빅토르 안) 선수가 있다. 안현수 선수는 2006년 동계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하여 금메달 3개를 획득한 선수다. 그러다 2010년 부상과 빙상 경기 연맹과의 갈등으로 그는 러시아로 귀화하게 되었고, 이번 동계 올림픽에서 8년 만에 다시 한번 쇼트트랙 전 종목 메달을 석권했다.

이 일로 인해 한국 사회 여기저기서 아쉬움과 불만이 터져 나왔다. 안현수라는 세계 최고의 선수를 경쟁국에 빼앗긴 아쉬움과 불만으로 사람들은 분노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자에게도 봄은 오는 것일까? 그러나 필자는 이를 좀 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안현수 선수를 생각하면 분명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아쉬움과 상실감을 뒤로하고 좀 더 큰 눈으로 바라본다면 우리에게는 또 다른 희망이 있다.

역사적으로 러시아에 있는 사할린은 수많은 우리 동포들이 일제 강점기 강제노동으로 유배를 간 곳으로 유명하다. 스탈린이 권력을 잡은 후에는 한국 동포들이 적색분자라고 하며 모든 “고려인들”을 다시 시베리아로 유배를 보냈다. 스탈린 사후에는 다시 상당수의 사람들이 옛 삶의 터전을 찾아 중앙 아시아로 옮겨왔는데, 그들이 바로 우리에게는 “카레이스키”라고 알려진 고려인들이다.

그들은 수많은 세월을 강제 노역과 유배로 보내야 했다. 눈물로, 아픔으로, 고통과 좌절 속에 수 십 년을 이방인으로 살아왔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안현수 선수는 러시아로 귀화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도 귀화와 동시에 러시아에서 명성을 떨친 우크라이나-고려인 혼혈 록 가수 빅토르 최를 따라 빅토르 안으로 바꾸었다.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번 올림픽에서 안현수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해 러시아 국기를 흔들 때 그곳에 있는 수백만의 고려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카레이스키는 무엇이라고 했을까?

아마도 안현수 선수를 통해서 오랜 세월 한 맺힌 응어리가 몽땅 씻겨 내려갔을 것이다. 수 십 년간 낯선 이방 땅에서 살아왔던 고려인들에게 안현수는 큰 희망과 기쁨을 준 것이다. 안현수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고 러시아 국기를 흔들 때, 그것은 모든 고려인들의 마음을 흔드는 사건이었다. 자랑스런 대한의 아들이 러시아 제국의 한 복판에서 수 십년 간 강제 노동과 유배로 빼앗긴 자의 삶을 살아왔던 고려인들에게 봄의 기쁨을, 큰 위로와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한국인의 마음을 품은 안현수 선수가 러시아에 살아가는 우리 민족에게 이렇게 큰 위로를 주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안현수를 빼앗겼다는 아쉬움보다 도리어 기쁨이 더 크게 다가온다. 대제국 러시아가 한국인 출신 한 사람을 통해서 이렇게 위로 받고 힘을 얻으니 세상에 이 같은 역사가 어디 있겠는가?

교회력 상으로 우리는 사순절 혹은 수난절을 보내고 있다. 이 사순절을 가리켜 영어로는 Lent 라고 한다. 이 말은 라틴어인데, 그 본래 뜻은 ‘봄’이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는 이 사순절을 왜 ‘봄’을 뜻하는 라틴어 Lent 로 표현했을까?

여기에는 깊은 신앙의 의미가 담겨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생명의 기운이 온 땅을 뒤덮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 신앙의 역사에서도 수난과 고통의 길은 있지만, 그것은 신앙의 봄을 준비하는 기간이고, 부활을 기다리는 길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사순절은 ‘봄’을 뜻하는 말로 담아 표현한 것이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십자가상에서 예수는 모든 것을 빼앗긴 자다. 하나님의 전능한 아들이라고 하신 분이 너무나 힘없이 모든 것을,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빼앗겼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18절 이하에 보면 유대인들은 분노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힘없이 모든 것을 빼앗길 수 있단 말인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이렇게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라면, 그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예수를 메시야로 맞이할 수가 없었다(고전 1: 22).

유대인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인간 이성을 바탕으로 가장 합리적인 사고를 했던 헬라인들에게도 십자가는 도대체가 이성으로는 풀 수가 없는 아이러니였다. 왜 강자가 죽어야 하는가? 중죄를 범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왜 하나님이 꼭 지어야 하는가? 인간 이성으로 받을 수가 없다. 우리 지혜로는 받을 수가 없다. 이것이 헬라인들의 생각이었다(고전 1: 21-22). 사도 바울이 정확하게 짚었다. “힘과 능력을 원하는 유태인 당신들에게는 하나님의 십자가가 걸림돌이지만,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인 여러분들에게는 바보 같은 어리석음일 뿐이지만, 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메시야요. 구세주이십니다(고전 1: 23-24).”

만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유대인들이 바라는 기적과 표적을 행하셨을지는 몰라도, 헬라인들이 바라는 인간 이성으로 이해될지는 몰라도, 인간을 위한 구원은 없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예수는 반드시 십자가를 짊어져야 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예수께서 모든 것을 빼앗긴 자로서가 아니라 도리어 더 큰 하나님의 계획, 곧 부활의 봄을 기다리는 자로서 인간의 구원을 위한 자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과 아픔은 부활의 때에 그 모든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부활의 아침에 기쁨과 환희로 바뀔 것이다. 죽음은 생명으로, 좌절은 희망으로, 고통은 치유로 바뀐다. 따라서 사순절은 다가올 그 부활의 봄을 기다리며 보내는 시간들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너무나 많은 자들이 빼앗긴 자의 삶을 살아간다. 자유를 빼앗겼고, 건강을 빼앗겼고, 물질을 빼앗겼다. 억압과 아픔, 배고픔 속에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많이 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먼저 그런 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자들이 되면 어떨까? 추운 겨울이지만 봄이 오고 있다고, 십자가의 고통이지만 부활의 봄이 오고 있다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이 사순절을 보내는 것이 어떨까?

‘빅토르 안’이라는 한 사람이 수 많은 고려인들의 마음을 위로하였듯이, 오늘 우리도 ‘빅토리 그리스도인’(Victory Christian)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승리와 구원자임을 전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