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 로드 한인교회 김칠곤 목사
 크로스 로드 한인교회 김칠곤 목사

페이스북에 대학교 동기이며 목사님 한분이 필자에게 짧은 글을 하나 남겼는데 그것은 "칠곤아! 서울신학대학 84학번 동기들이 만든 밴드에 너를 초대하고 싶은데 전화 번호 좀 줄래"이러한 문자를 받은 후에 이민 목회를 하는 필자에게 밴드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상당히 궁금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기들이 다움이라는 사이트에서 만든 카페의 이용이 너무나 불편하고 속도가 느려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밴드라는 프로그램으로 카카오톡처럼 대학교 동기들과 함께 그룹 채팅을 하는 것이다. 대학교 동기들과 함께 밴드속에서 대화를 하면서 카카오톡이 가지지 못한 기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번째,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각기 자신들이 살아가는 삶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소중한 가치를 너무나 편하고 꾸밈이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두번째, 수 십년전 대학교 때, 친구들의 외형적인 모습이 조금은 달라졌을 지라도 대학에 다닐때 아웅다웅하고 장난끼 썪인 말들을 편하게 주고 받았던 것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번째, 문자로 대화를 하는데 있어서 목사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아니한다. 나이가 어린 동기는 나이 먹은 동기에게 "형" 이나 "언니" 라고 하고 목회를 하지 아니하는 동기들은 목회하는 동기에게 목사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이름을 부른다. 시간이 나면 언제나 어디에서나 밴트를 통해 지난날 그리웠던 동기들과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삶을 한 차원 젊게 하는 것 같다.

많은 대화들 중에 한 친구가 현장에서 힘들게 목회를 하는 친구들을 위로하기 위해 '십자가의 무게'에 관한 글을 동기 사이트에 올려 놓았는데 필자의 마음속에 너무나 공감이 가는 것이었다.

한 학자가 불만에 찬 어조로 하나님께 항변을 했다. "어떤 사람은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불행합니다. 이것은 몹시 불공평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하나님은 그 학자를 요단 강변으로 불렀다. 요단강은 사람들이 세상살이를 마치고 건너오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지역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강을 건너 왔다. 하나님은 그 학자에게 말했다. "저들이 지고 온 십자가의 무게를 달아보아라." 학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강을 건넌 사람들의 십자가를 모두 달아 보았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큰 십자가도 아주 작은 십자가도 그 무게가 똑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본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십자가를 줄 때 누구한테나 똑같은 십자가를 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웃으면서 가볍게 안고 살고, 어떤 사람은 고통스러워하면서 쇠덩어리처럼 무겁게 짊어지고 산다. 내가 늘 똑 같이 공평하게 주지만 이렇게 저마다 다르게 받는 것이 삶이라는 십자가다."이렇게 삶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나의 삶의 고통의 무게가 상대의 삶의 고통의 무게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비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삶의 십자가의 무게는 누군가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내가 짊어 지고 가는 십자가 보다 더 힘겹게 자신들의 삶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삶에서 주어지는 십자가의 무게가 마음속에 무겁게 느껴진다는 것은 이미 혼자서 짊어지고 가기 힘들다는 것이며 삶속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이 삶속에서 고통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목회를 하면서 경험하는 것인데 사역에 스트레스를 받지 아니하려고 수도 없이 마음을 다스려 보아도 스트레스는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주어진다. 사역에 힘들어 하는 친구 목사에게 목회를 하지 않는 동기가 위로의 글을 하나 올렸는데 그것은 "친구야!,  속병 걸리지 말구 시집을 간 며느리가 시어머니 앞에서 눈감고 3년, 귀머거리3년, 벙어리3년을 지내면 아무 탈이 없이 살수 있는 것 처럼 그렇게 사역해"그리고 "힘내"라는 것이었다.

이말은 삶의 고통이 주어져도 바보처럼 살다보면 삶의 희망이 보일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한 필자가 그 친구가 남긴 글 아래 댓글을 하나 달았는데 그것은 "목사는 9년만 바보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을 마칠때까지 평생을 바보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해"소리없이 평생 바보처럼 살아가는 일을 인간적으로 본다면 너무나 큰 십자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목사는 신(神)이 아니기에 사역을 하는 동안에 스트레스를 받아도 그것을 혼자의 힘으로 다 이겨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으로 볼때 인간의 마음과 힘으로 마음을 통제 할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아브라함 링컨은 이것에 대해 말하기를 "행복은 우리 안에 있는 것도, 우리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되는데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될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며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목회자가 사역을 하는데 바보가 될 수 있는 것은 목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가능한 것이며 자신에게 주어지는 사역의 십자가가 나에게 가장 알맞은 것이며 편안한 십자가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혹자는 십자가의 무게가 가로 세로 합쳐서 100kg이라고 말을 하는데 이것은 왠만한 사람들의 몸무게 보다 더 나가기에 보통 사람이 짊어지고 가기에는 엄청난 무게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에 못박혀 죽으셨다. 주님은 십자가에 무게 뿐 만 아니라 십자가상에서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의 조롱, 수치, 살결이 찌져지는 고통, 피가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무게를 감당하셨다.

예수님은 물리적인 십자가의 무게보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십자가의 무게의 고통이 더 크셨지만 그것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겨내신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님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의 무게 이었지만 그것을 이겨내신 예수님은 부활 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을 가장 높이셨고 영화롭게 하신 것이다.

인간은 삶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무거운 짐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것은 죄의 짐, 삶의 짐, 죽음의 짐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것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삶속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같은 자신의 욕구를 더 많이 이루기 위해 죄를 지을 뿐 아니라 누군가에게 상처의 고통을 주며 산다. 그 과정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럴때 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신 삶의 십자가의 무게는 동일하며 그 무게를 나만의 고통의 무게로 느끼지 아니하기 위해서는 항상 주안에 거하며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