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원 목사
(Photo : ) 서승원 목사

3.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의 관계

2)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에 대한
상반된 견해들

그런데 위에서 헹겔이 지적한 신약학자들에게 있어서의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에 대한 오해와 유사한 오해를 유다이즘의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코헨은 그의 책 <마카비 형제들로부터 미슈나에 이르기까지>에서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이 서로 대립된 개념으로 이해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현대의 학자들은 헬레니즘이란 말을 두 가지 뜻으로 사용한다. 한 가지는 헬레니즘이 알렉산더 대왕과 그 후계자들이 동방민족들에게 가져다 준 문화, 사회, 그리고 생활방식을 뜻한다. 그 문화는 헬레니스틱이다. 왜냐하면 그 언어가 희랍인들의 것이요, 그 문학이 희랍인들의 것이며, 그들의 사상이 희랍인들의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희랍인들의 것이며, 그 사회적 엘리트들이 희랍인들이요, 그 가장 특유한 사회적 제도 즉 폴리스가 희랍인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헬레니즘은 정복자에 의해서 이송된 생활양식이요, 그것은 유대인들과 모든 동방인들에게 하나의 큰 도전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희랍신들에 대한 경배와 희랍인들의 관행인 헬레니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유대적인 관행인 유다이즘에 대한 반대말(antonym)이다. 이러한 인식과 어법(usage)은 마카비문서 1, 2에 담겨져 있는 안티오커스의 박해와 마카베우스 형제들의 봉기에 대한 서술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 나아가 코헨은 헬레니스틱 유다이즘(Hellenistic Judaism)과 팔레스타인적 유다이즘(Palestinian Judaism)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헬레니즘에 대한 인식은 팔레스타인적 유다이즘에 대한 반대어로서의 헬레니스틱 유다이즘에 대한 인식을 가져왔다. 이 견해에 의하면 헬레니스틱 유대인들이란 디아스포라에 살고, 희랍어를 말하고 글을 희랍어로 쓰고, 그들의 종교를 헬레니스틱 세계에서 도입된 사상과 관행으로 물들게 한 유대인들이다. 이에 반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모국에서 살며,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말하고 글을 이들 언어로 쓰고, 그들의 종교의 엄격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외적 전염(foreign contagion)으로부터 그것을 순수하게 지키기 위해 투쟁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인식은 팔레스타인의 정통적(orthodox)이고 율법주의적(legalistic)인 유대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세련되고 세계시민적 (즉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유대인을 대표하는 다소의 바울이란 인물과 초기기독교에서 히브리인들과 헬라파 사람들(Hellenists) 사람들 사이의 대립을 말하는 사도행전 6:1에 의해서 유래한다.

여기서 코헨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을 헬라적 유대인들 즉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과 날카롭게 대립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는 여기서 그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헬레니스틱 시대의 모든 유다이즘은, 디아스포라와 이스라엘의 땅의 그것들을 포함하여, 헬라화 되었다(were Hellenized). 다시 말해 고대세계의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이었다. 유다이즘의 어떤 면들은 다른 면들보다 더 헬라화 되었으나 어떤 것도 고립된 섬이 아니었다. 팔레스타인이 유다이즘의 순수한 형태를 보존한 반면에 디아스포라는 변질되었거나 혼합된 형태의 유다이즘의 본향(the home of adulterated or diluted forms of Judaism)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코헨이 그의 책 <마카비 형제들로부터 미슈나에 이르기까지>를 출판한 때는 1987년이다. 2001년에 발표한 “예기치 않은 곳에서의 헬레니즘” (Hellenism in Unexpected Places)이란 제목의 논문에서 그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쿰란공동체, 유대전쟁을 주도한 자들, 그리고 랍비들까지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의 차이에 대해서 헹겔은 말한다:

원래 아람어를 말한 팔레스타인과 바벨론의 디아스포라에 살던 유대인들과는 대조적으로 헬라적 유대인들과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그 말의 실제적 그리고 원래의 의미에서) 그 모국어가 희랍어인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의 모국어의 관점에서 누가는 사도행전 6:1에서 헬라파 사람들과 히브리인들을 구분하고 있다. 헬라파 사람들의 모국어는 희랍어이고 히브리인들의 모국어는 아람어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그룹의 사람들을 성지의 메트로폴리스인 바로 예루살렘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래서 일반적 구분과는 사뭇 다르다. 예수님 당시 희랍어는 약 삼 백년 이상 쓰여져 왔고 그 배후에는 길고도 다양한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쉽게 잊혀지곤 한다.

삼백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 일어난 변화가 미미하였으리라고 상정하기 힘들다. 문제는 그 변화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스톤(Michael Edward Stone)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모든 연구들의 누적된 결과는 그레코-로망(Graeco-Roman) 시대에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미친 헬레니즘의 영향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 왔다. 그러한 영향은 더 이상 과소평가 되어질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디아스포라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헬라화(Hellenization)에 대한 뚜렷한 증거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에 대한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 가능성은 남아있다. 분명한 것은 희랍어와 희랍문화의 요소들의 침투가 상당하였으리라는 것이다.

이어서 스톤은 유대 본토와 디아스포라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스라엘 내에서의 유대인들의 공동체와 디아스포라에 있어서의 공동체들의 관계에 대한 평가를 내리려 할 때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론 디아스포라의 모든 공동체들이 예루살렘과 동일한 관계를 유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많은 공동체들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바는 극히 빈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들이 퍽 긴밀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많은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은 당시 예루살렘에 회당이나 또는 유사한 기관(centers)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더욱이 주요 절기 때에 이루어지는 성지순례(pilgrimage)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먼 지방에서뿐만 아니라 디아스포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