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Photo : )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시내 도로나 고속도로를 달릴 때 도로가 막혀 짜증이 날 때가 있다. 그 때 버스 전용차선에 들어서서 달릴 때 기분이 어떤가? 다른 차들은 정체가 되어서 거북이 걸음을 하고 있는데 거침없이 달리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수십층이 되는 건물을 걸어 올라가면 어떨까? 정말 기절할 일이다. 그런데 기분 좋게 올라가는 방법이 있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 것이다. 순식간에 수십층의 건물을 올라갈 수 있다. 힘들이지 않고.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려 애쓰는가? 당신이 가진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려 하는가? 그런데 더 좋은 길이 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얻어 살아가는 것이다. 어린 시절 가을 운동회를 회상해 보라. 부모님 손을 잡고 달리기를 하는 경기가 있었다. 그 때 아이의 달리기 실력보다 아버지의 실력과 힘이 큰 덕이 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는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접속만 하면 하나님의 자원을 얻어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부터 날씨가 추워져 침대에 있는 전기장판에 전기를 넣고 잔다. 우리 방이나 아들 방은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두 딸이 자는 방 침대에 문제가 생겼다. 전기 코드를 꽂아야 하는데 코드가 없어졌다. 아내와 내가 아무리 찾아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어디엔가 치워 두었을 텐데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포기했다.

어쩔 수 없이 방에 와서 자려고 누웠다. 그런데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차가운 침대에서 잘 딸들을 생각하니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뒤져보기로 했다. 결국 아내가 찾아냈다. 그날 밤 우리 모두는 따뜻하게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전기장판 덕분에.

전기장판이 있어도, 코드를 접속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기도는 하늘에 접속하는 것이다. 답답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스스로 고민만 하지 말고 하나님께 접속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얻으려 애쓰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무릎을 꿇는 게 좋다.

유다 왕 아하스는 다윗의 길을 좇지 않았다. 그러자 하나님은 유다를 아람과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다(대하 28:5). 아하스 왕은 앗수르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했다. 그런데 앗수르는 아하스를 돕기는 커녕 오히려 그를 공격했다(대하 28:20).

아하스 왕이 아람의 침략으로 곤고할 때 어떻게 했는지 아는가? 그는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했다.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그런데 성경은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다'고 말한다(대하 28:22-23).

당신은 답답하고 곤고할 때 무엇을 하는가? 수능시험이 다가온다. 지금 수시를 보느라 분주한 아이들도 있다. 이때쯤이면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 있다. 바로 점집이다. 불안한 마음을 그 무엇엔가 의지해 보려 한다. 그런데 아는가? 성경은 그것을 망할 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마저 점집을 찾는다고 하니 기막힐 일이 아닌가?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는 그 아버지와 사뭇 달랐다. 그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해 왔을 때 '하나님이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백성들을 격려했다. 뿐만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와 함께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했다(대하 32:20).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내가 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어느 누군들 자신의 노력을 등한히 하겠는가? 남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분주하게, 뼈 빠져라 노력하고 노력한다. 그런데 그들은 말한다. '이게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라고.

'내가 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 힘과 능력으로 살려고 애쓴다. 그러다가 지친다.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치고. 사람이 지치다 보면 짜증스럽다. 속상하다. 그래서 불평을 하게 되고, 사람들을 원만하게 된다. 그러니 그런 사람 가까이 누가 있고 싶겠는가?

그러나 '주님이 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인정한다. 그러니 교만할 수 없다. 함께 일하기를 원한다. 자기 공로를 내세울 수도 없다. 자랑할 게 없다. 그저 주변 사람들이 도와 준 덕이다. 그들이 필요할 따름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의 곁에 머물길 좋아한다.

자신이 부족하기에 하나님을 의지한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 접속하려 한다.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했다. 나쁜 동기와 의도를 갖고 있었다. 사람이 마음에 악하고 나쁜 생각을 품는 건 위험하다. 왜?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은 이내 행동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헤롯은 야고보를 죽였다. 야고보의 죽음을 본 유대인들은 좋아했다. 그러자 헤롯은 또다른 음모를 꾸몄다. 바로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를 죽이려는 계획이었다. 사람의 인기와 환심을 사려는 헤롯에게 옳고 그름의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정치적 편리를 위해서는 무엇이나 할 수 있었다.

결국 베드로는 체포되었다. 옥에 갇혔다. 군인 네 사람씩 한 조를 이루어 네 조가 교대로 베드로를 지켰다. 문 밖에서 두 사람이 파수를 했다. 감옥 안에서는 두 사람이 베드로와 함께 쇠사슬을 맨 채 지켰다. 도망갈 수도 없고, 살아날 가능성은 제로 상태.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내일이면 죽을 텐데 평안하게 잠이 든 베드로. 잠든 베드로에게 나타난 주의 사자. 천사가 잠자고 있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웠다. 베드로는 영문도 모른 채 일어났다. 그리고 천사가 안내하는 대로 출옥했다. 무사하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성경은 말한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 12:5)".

베드로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그 때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12절). 할렐루야! 베드로에게 일어난 기적은 여기에 모여 기도하는 사람들 덕이었다. 하늘에 접속했더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가?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기도는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는 기적을 일으킨다. 기도는 하늘에 접속하는 것이다. 하늘의 능력을 덧입어 사는 비결이다. 그래서 신성종 목사님은 말한다. "이적은 기도의 아들이며, 기도 없이 이적은 나타나지 않는다."

기도 응답이 연례행사가 되지 않고 날마다 경험하는 일상이 되어 지기를 바란다. 습관적으로 기도하고, 기도해서 날마다 기적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좋은 일'이라고 하면 무엇에든지 '주역'이 되자. 특히 기도에는 조역이 되지 말고 주역이 되어야 한다. 수지맞는 일이니까. 기도의 주역이야말로 하나님의 보좌를 흔든다. 기도하기에 적격인 계절이 다가왔다. 불안해하는 수험생들도, 불안해하는 자녀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부모도, 염려의 버튼에서 기도의 버튼으로 손을 옮겨야 한다. 지금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