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Photo : ) 신성욱 교수

[1] 방금 ‘이명호’라는 분이 쓴 시를 하나 읽었다. 네 줄밖에 안 되는 아주 짧은 시인데, 임팩트가 강해서 여러 번에 걸쳐 읽고 묵상해 보았다. 잘 모르는 이름이라서 인터넷에 찾아보니 자칭 ‘발로 시 쓰는 뇌성마비 무명 시인’이라고 한다. 한편으론 복음성가의 작사가이기도 하단다. 뇌성마비 환자에다가 발로 쓴 시라고 하니 더욱 의미가 달라 보이는 내용이다.
그의 시를 아래에 소개한다.

[2] <죽음에 관하여>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렇게도 살고 싶은 날이라는데
어제 죽은 이가 나는 왜 그리 부러운지 몰라!

[3] ‘뇌성마비 환자라서 죽은 이가 부럽다고 한 걸까?’를 생각해 보았다. 몸이 조금만 아파도 만사가 귀찮아지고, 고통이 심할 땐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하물며 평생을 몸이 뒤틀린 채로 살아야 하는 환자의 심정이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리라.
그런데 자세히 보니 시 내용 밑에 성구가 하나 적혀 있었다. ‘고후 5:8’이었다. 내용은 이렇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4] 삼층천을 경험한 바 있는 바울은 이 땅에서의 삶이 힘들고 괴로워도 죽음 이후엔 영원한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더 좋다고 한 것이다.
불의하고 거짓되고 터무니없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하루빨리 예수님의 재림이 이뤄지든지, 아니면 개인 종말을 맞아서 천국 가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 꼴이 말이 아닌 게 사실이다.

[5] 이건 나라라고 할 수가 없다. 육십 평생 살아오면서 지난 수년간과 같은 꼴은 처음 본다. 누구의 말대로 정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을 보고 있다. 오죽하면 어제나 오늘 죽은 이가 부럽기 짝이 없을 정도인지. 그런 세상을 다시 한번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건강에 심각한 문제까지 생긴다면 정말 죽고 싶어질 거 같다.
바울은 이 땅에서의 삶보다 천국에서 주와 함께 사는 것을 더 사모했다.

[6]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천국을 한번 맛본 경험이 있기에 그 마음이 더욱 진할 것으로 생각한다. 불의가 판을 치고 불법이 난무하고 살맛이 전혀 나지 않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을 생각하면 용기를 갖게 된다.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같이 허탄하고 덧없는 세상에서 미련을 많이 떨쳐버리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에 더욱 주목하고 사는 것(고후 4:18)이 지혜로운 삶이라 생각한다.

[7] 우리는 모두 다 허물 많고 죄 많고 연약한 육신을 입은 자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연약한 질그릇에 천하보다 소중한 보배를 가진 최고로 복된 자들(고후 4:7)이다.
15년 전쯤, 동해에서 설교 세미나를 마친 후 강의를 들은 목사님들과 해변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식사 중에 한 분이 프랑스에 2천만 원짜리 닭고기 요리가 있다는 얘길 했다. 닭 한 마리가 비싸 봐야 1~2만 원 더 하겠는가?

[8] 그런데 어떻게 2천만 원짜리의 닭고기 요리가 있단 말이냐고 물었다. 그때 그분이 하는 말이, 닭고기가 그렇게 비쌀 리는 없고 그 닭고기 요리를 얼마짜리 술을 부어서 요리했느냐에 따라서 가격이 천차만별이라고 답을 했다. 백만 원짜리 술을 부으면 100만 원짜리 닭고기 요리, 2천만 원짜리 술을 부으면 2천만 원짜리 고가의 닭고기 요리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때 퍼뜩 떠오른 말씀이 고후 4:18의 말씀이다.

[9] 육신의 장막을 입은 한계상황의 우리는 질그릇 같이 보잘 것 없는 존재가 틀림없다. 그런데 여기에 2천만 원 정도가 아니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내 속에 들어오셨다. ‘값으로 매길 수 없을’(priceless) 정도로 소중한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어지심으로 우리의 가치도 덩달아 올라가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의인’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최고의 ‘걸작품’(ποίημα, masterpiece) 인생이 된 것이다.

[10] 이렇게 존귀한 ‘신분’(Being)을 얻게 된 우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땅에서 낙심과 절망 속에 현세에서의 삶을 포기하려 해선 안 된다. 하나님 오라 하시는 순간까지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을 늘 의식하면서 이 땅에서 기쁨과 감사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사명을 잘 감당하면서 살아야 한다.
고난주간을 맞아 성경을 묵상하면서 새로운 시를 한 편 적어본다.
제목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11] <생명에 관하여>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렇게도 살고 싶은 날이라는데,
어제 죽은 이가 나는 조금도 부럽지 않아.
이 땅에서 경험하는 날마다의 죽음이
진정한 생명이 시작이기 때문이라네

                 (고전 1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