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1483-1546)가 태어난(1483) 다음 해에 그의 온 가족이 광산 중심지인 만스필드로 이사했다. 아버지 한스 루터는 광부였는데 영주(領主)에게서 빌린 세 개의 용광로로 공장을 운영할 만큼 성공을 거두었다.
1501년 봄 그는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에르프르트 대학에 들어가 1502년 가을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1505년에는 우수한 성적으로 석사 학위도 받았다.
대학 재학 시절, 그는 로마 교황의 세속화에 반대하는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 루터는 부모님과 친구들의 의아해하는 시선을 뒤로 하고, 세상을 등진 채 어거스틴파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마르틴 루터는 수도사가 되어 자신의 종교적 삶을 시작했다.
그는 그곳에서 마음을 다해 수도에 전념하고, 각종 고행과 고해성사를 반복했다. 1512년 그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비텐베르크 성당(이 성당은 비텐베르크 성(省)/ 비텐베르크 대학의 부속 성당) 부원장이자 비텐비르크 대학 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512년에서 1513년 사이에 그는 서서히 자신의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through grace, 은혜로 인한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는 원리) 교리를 확립했다. 그는 한 사람의 영혼적 구원이란 개인의 경건한 신앙에 의해 이루어지며, 외재적인 선공(善功)이나 교회의 권위(權威)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 학설은 가톨릭의 면죄부 판매의 근거가 된 이론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의 사회적 정치권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1517년 교황 레오 10세가 면죄부의 발행과 판매를 빌미로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해,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성당 문 앞에 <면죄부 판매에 대한 논제>(95개조 반박문)를 써 붙였다.
이 <논제>는 곧 강력한 반향을 일으켜 교회의 권력에 대한 원한과 분노 및 반대의 감정을 들끓게 만들었다. 이것이 곧 독일 종교개혁의 불꽃을 일으켜, 순식간에 루터를 독일 국민들의 대변인으로 만들어버렸다.
1519년 로마 교회 신학자 요한 에크와 마르틴 루터는 라이프치히에서 대논쟁을 벌이게 됐다. 이 변론에서 루터는 종교개혁의 대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1520년 10월 교황은 루터에게 60일 내에 죄를 뉘우치고 잘못을 인정하도록 명령했고, 이를 거부한다면 그를 파면하겠다는 내용의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루터는 온갖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그를 옹호하는 자들의 환호 속에 교황의 조서를 불태워버림으로써, 교황청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더욱 공고히 했다.
루터의 이런 행동은 독일과 서유럽의 각 국민들을 고무시켜 나갔다. 1521년 4월 교황은 보름스에서 공의회(公議會, Councils)를 열고 루터의 죄를 언도했으나, 루터는 논리적인 주장으로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로마 교황청은 루터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되자, 무지막지한 고문을 가하고 법률적 보호를 받을 수 없도록 선언하고 말았다. 그 후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에 은거하면서 종교개혁 작업에 몰두했다. 1525년 루터는 42세 때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하여 가톨릭의 금욕주의에 실천적 행동으로 저항했다.
1543년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의 <성경>은 사람들이 가톨릭에 대항하는 사상적 무기가 되었다. 독일어로 쓰여진 이 <성경>은 분산된 독일 여러 지방을 통일된 하나의 연방국으로 단합시켰다.
1546년 2월 루터는 자신이 태어났던 아이슬레벤에서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29년 전 한 시대를 뒤흔든 '95개조 반박문'을 써 붙였던 비텐베르크 성당 묘지에 묻혀 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찬송 585장)"는 루터가 1529년 작사·작곡한 것이다.
김형태 박사(한남대학교 14-15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