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5주년 전날 밤, 21세기 선진국 대열에 오른 서울 한복판에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발생했다. 참으로 안쓰럽고 민망하였다. 그리고 1020 세대들에게 정말 미안했다. 156명의 꽃다운 청춘들이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끔찍한 <압사 사건>은 전 세계적 뉴스였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들과 딸을 잃은 부모님들과 가족들을 위해서 주님의 은총과 위로가 있기를 기도하는 것뿐이다. 그동안 코로나19로 통제되었던 젊은이들은 그 해방감을 어디든지 표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할로윈 전야제>였던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도 할로윈 전야제를 구경한 적이 있다. 할로윈은 본래 겔트족의 토속신앙이고, 토속문화로서 죽은 귀신을 달래거나 쫓기 위해서, 귀신보다 더 귀신같은 복장을 하고 귀신을 쫓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할로윈은 한 마디로 귀신축제이자, 사탄의 축제인데 이것이 미국으로 건너와서 거대한 축제가 되었다. 거기다가 상업주의가 가담해서 이런 이교 문화, 병든 문화가 지금 온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귀신 달래기가 축제가 되고 문화가 되어, 어린이 젊은이 할 것 없이 깊이 침투해서 이 지경이 되었다. 그러니 이런 불행한 참사를 교묘히 정치에 이용하려는 자들은 사람이 아니다.
요즘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에 이르기까지 이런 놀이 문화가 마치 옛날부터 우리에게 있었던 것처럼 독버섯처럼 퍼져있다. 하기는 문화란 이름 아래 정치, 경제, 사회, 예술, 종교에 이르기까지 범람하고 있다. 특히 문화란 이름으로 공산주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안방까지 쳐들어 왔다. 말도 안 되는 폭력적이고, 혁명적이고, 사회주의적 내용이 영화란 이름으로 사람들을 홀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세계 시장에서 대상을 거머쥐면서 국격을 높인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문화란 이름의 정치요, 권력이다. 이른바 <문화맑스주의>다. 일단 문화란 이름을 띄고 하는 일에 사람들은 모두가 속고 있다. 그리고 그 문화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세상을 바꾸고 있다.
이번의 할로윈 행사에 SNS가 한몫했고, 언론이 동원되고, 상업주의가 큰일을 했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다. 사람들은 문화는 다 좋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문화에는 오늘의 동성애나, 성 해방, 마약의 병든 문화, 타락한 문화가 너무나 많다. 만에 하나 병든 문화가 나라에 보편화 되면, 교육과 사회와 가정이 병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코로나19만 무서운 것이 아니라, 병든 문화를 치유하는 것이 더욱 시급하다. 왜냐하면 그 문화가 삶의 양식이나, 세계관을 지배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할로윈 같은 귀신 놀이문화는 이제 크리스마스를 대신하게 되었다. 서구 문화가 점차 퇴색하고 서양에는 이슬람 문화가 침투되었고, 여기에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2000년 기독교의 흐름과 문화를 살펴보면, 기독교와 문화는 대게 몇 가지 경우가 있었다. 기독교가 문화를 지배하던 경우와 문화가 기독교를 지배하던 때가 있었다. 기독교의 선교과정에서 선교를 핑계 삼아 당시의 문화적 현상을 그대로 수용한 경우가 있었다. 특히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 그 당시 그 주변에 있었던 여신숭배 사상을 그대로 교회로 끌어들였다. 그것이 카톨릭의 <마리아 숭배 사상>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토속신앙이었던 <태양신 숭배 사상>을 카톨릭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교권이 정권 위에 군림하려고 교황제도를 만든 것이 오늘의 카톨릭이다.
카톨릭이 겔트족에게 전도될 때도 당시의 토속신앙을 그대로 용인하고 포용한 것이 바로 할로윈의 전통이다. 이렇게 할로윈의 전통은 기독교 신앙과는 하늘과 땅 같은 다른 차이인데도, 문화니, 축제니 하는 형태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문화의 권력은 대단하다. 그 문화는 전통이 되고 세습이 되고 있다. 하기는 온 세상이 축제 천지다. 한국에도 최근에는 지자체별로 스토리텔링을 개발해서 새로운 축제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귀신 놀이인 할로윈에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그리 열광하는 것인가? 아마도 할로윈이 주는 재미와 기상천외의 귀신 복장이 아닌가 싶다. 아마도 코로나19 이후 통재되고 팍팍한 현실을 탈출하여 젊음의 열정을 발산하고 싶은 충동에서 나왔으리라고 본다. 그날은 묘하게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기념일과 할로윈 축제와 겹치기 날짜가 되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종교개혁을 한 것은, 세상의 모든 종교를 개혁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당시 성경에서 멀어지고 복음에서 멀어져서 교황권이 지배하던 시기, 면죄부(Indulgentia)를 발행해서 베드로 성당을 짓는데 사용한 타락한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데서 시작되었다. 1517년 10월 30일 루터는 비턴벍(Wittenberg)교회 정문에 95개조 항의문을 붙이고, 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종교개혁이란 말보다는 <교회개혁>이란 말을 더 선호한다. 루터의 다음 주자인 요한 칼빈에 대해서 당시 문헌에는 <교회의 개혁자 요한 칼빈>이라고 써 있다. 교회개혁이란 끊임없이 <말씀>과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성경과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 번의 개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교회는 날마다 말씀과 성령으로 새롭게 개혁되고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할로윈 데이의 이태원 참사로 아까운 젊은이들이 희생되거나 다친 것을 보고, 교회의 책임과 사명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오늘 한국의 불행도 결국 <병든 문화>와 <타락한 문화>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성경적 세계관을 가진 꿈과 희망과 대안 제시를 하지 못한 교회의 책임이 아닐는지!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대신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