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구한말 암울 현실 울타리 넘어 천국시민 약속
비루했던 과거 넘어 승리 도취 민족의식 갖는 대신
고난 가득한 민족적 현실 떠올리는 게 올바른 접근
민족 발전에 만족하고 안주, 복음에 대한 관심 식어 

박욱주 교수님의 이번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화제작 <한산: 용의 출현>을 다룹니다. 김한민 감독이 제작한 이 영화는 박해일(이순신), 변요한(와카자카 야스하루), 안성기(어영담), 손현주(원균), 김성규(준사), 김성균(가토 요시아키), 김향기(정보름), 옥택연(임준영), 공명(이억기), 박지환(나대용), 윤제문(구로다 간베에), 조재윤(마나베 사마노조), 박재민(와타나베 시치에몬), 김한민(권율) 등의 배우가 출연해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약자의 민족의식: 군사적으로 낙후된 민족의 서글픈 자기이해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의 군사력이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시기(16세기 중반-20세기 중반) 초반에 발발한 전쟁이다. 이는 곧 임진왜란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우리 민족이 숱한 외침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한 채 갖은 고초와 굴욕을 감내해야 했다는 뜻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16세기 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17세기 초), 병인양요와 신미양요(19세기 중반), 동학농민전쟁(19세기 말), 그리고 한국전쟁(20세기 중반)까지, 임진왜란 이후 우리 민족이 겪은 전쟁은 단 한 건의 예외도 없이 처참한 인명피해와 국력 쇠퇴, 그리고 외세에 대한 의존 강화라는 고통스러운 결과를 남겼다.

물론 두 차례 호란 이후 청국에 볼모로 잡혀간 쓰라린 기억이 있었던 효종은 조선의 군사력 회복에 많은 힘을 들여 잠시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그가 이른 나이에 사망함에 따라 그 노력이 후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을 잠깐이나마 자력으로 막아냈다는 점에서 승리한 전투로 기억될 수 있겠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역시 상대에 비해 우리 편이 당한 피해가 훨씬 컸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종합해 보자면 임진왜란 이후 한국전쟁까지 우리 민족의 전쟁사 속에는 전술적 승리의 순간이 드문드문 존재하지만, 전략적 차원에서는 패배하거나 실패를 맛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 민족에게는 중간중간 드물게나마 경험한 국지적인 승리의 기억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마저 없었으면 우리 민족 스스로에 대한 군사적 자긍심을 세우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이나 권율 같은 명장들, 곽재우 등 크고 작은 공을 세운 의병들, 홍범도와 김좌진 등 독립군을 이끌었던 맹장들,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여러 전쟁 영웅들은 우리 역사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위대한 인물들이다. 국가의 시스템이 도저히 강대한 외적을 물리치기 힘들도록 망가진 상태에서, 온갖 난관을 헤치고 전술적으로나마 승리를 거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이순신 장군의 전과는 경이로울 지경이다. 그는 자신이 지휘한 해전 대부분을 명백한 승리로 이끌었으며, 패전이라고 할 만한 전투는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38승 5무). 이것이 21세기 현재까지도 <한산: 용의 출현>처럼 그의 전공과 삶을 담은 대중문화 콘텐츠가 수시로 제작되는 이유이다.

길고 긴 군사 약소국의 역사에 거의 찾아보기 힘든 전공을 거두었기에, 우리는 거듭해서 이순신 장군에게 경탄과 감동을 느끼는 것이다.

무엇보다 제국주의 시대 영국이나 근현대 미국의 명장들처럼 막대한 군사적 자원이 뒷받침된 상태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제한된 군사적 자원을 가지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승리를 거두었기에 이순신 장군의 승리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더 크게 증폭된다. 

한산: 용의 출현
▲<한산: 용의 출현>의 조선 수군. 한정된 자원으로 악전고투를 치러야 했다.

◈복음과 민족의식: 복음 전파의 지향점이 아닌 수단으로서의 민족의식 

이런 전쟁사적 배경을 지닌 우리의 민족의식은 영국, 미국, 일본 등 과거 제국주의 열강들, 그리고 중국, 러시아, 인도 등 오늘날 몇몇 지역 패권국들에게서 확인되는 승리의 자긍심에 도취된 민족주의와는 성격이 크게 다르다. 우리의 민족의식은 약소국의 설움으로 얼룩진 서글픈 민족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봤을 때 양측 중 어느 편이 낫겠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약소국의 민족의식, 서글픈 민족의식이 바람직하다고 답할 것이다. 자기 민족이 지닌 강대함과 그로부터 말미암는 자긍심에 기대는 심리는 마음의 우상으로 발전될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처럼 스스로의 역사를 되짚어볼 때, 도무지 자긍심 어린 민족주의를 일으키기 어려운 민족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더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이들은 국가와 민족의 부강함이라는 것이 잠시 손에 붙들 수는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기대를 저버린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뼈저리게 경험해 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약성경은 한 발 더 나아가, 어떤 형태로든 민족과 국가에 의존하려는 마음을 아예 포기하게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민족이라는 울타리를 철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가르친다. 복음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인류 전체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절대적 보편성을 갖기 때문에, 특정 민족의 울타리에 갇힐 수 없다.

따라서 특정 민족의 울타리에 갇힌 사고와 삶의 방식은 민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데 잠정적으로는 도움이 될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복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량>이나 <한산: 용의 출현> 같은 작품에서 기독교인이 구해야 할 것은 민족감정이 주는 만족감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꽤 오랫동안 고통스럽고 암울한 시기를 거쳐왔다는 사실에 대한 냉정하고도 서글픈 자기이해여야 한다.

그리고 이런 불편한 자기이해는 우리 민족과 그 일원인 자신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그런 민족적 굴레로부터 우리를 진정으로 해방시켜 주는 복음의 위대함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져야 한다. 

한산: 용의 출현
▲<한산: 용의 출현>의 나대용(박지환 분),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거북선의 설계자인 동시에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수전을 지휘한 유능한 장수였다.

우리 민족의 개신교 선교는 바로 이런 정신적 각성을 일으키는 데서부터 본격화되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우리 한국인들이 도무지 나라와 민족의 현실로부터 희망이나 기대감을 갖기 어려운 상황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은 이 암울한 울타리를 뛰어넘어, 천국의 시민권을 약속하는 복음에 최고의 소망을 두도록 가르치고 설득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꽤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오해 중 하나가 복음이 우리 민족의 중흥과 부강함을 위해 주어졌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복음과 민족의 관계를 잘못 이해한 데서 나온 생각이다.

한국의 개신교 선교 역사에서 민족감정과 민족의식은 복음의 전파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였을 뿐 목적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교회 개척과 부흥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네비우스 선교전략도 처음에는 복음 전파를 위해 민족의식을 이용하지만, 종국에는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민족의 틀을 벗어나 인류 전체에 전달되는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를 바라보게 만든다.

이런 맥락에서 <한산: 용의 출현>은 두 가지 시각으로 읽혀질 수 있다.

비루했던 과거를 묻어두고 승리와 부강함에 도취된 민족의식을 향유할 것인가, 아니면 얼마 되지 않는 소중한 승리로 커다란 위안을 삼아야 할만큼 고난스러웠던 우리의 민족적 현실을 떠올릴 것인가. 전자보다는 후자가 이 영화에 대한 올바른 접근 및 해석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래 들어 우리 나라가 경제적, 기술적, 문화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룩하여 선진국 대열의 말석에 한 발 걸치게 되면서, 약자의 서글픈 민족의식을 애써 망각하려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다.

특히 방위산업 부문에서 약진을 거두면서 상처받은 군사적 자긍심을 극대화하려는 분위기가 뚜렷하다. <한산: 용의 출현>은 공교롭게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기독교 신앙인에게 민족의식이란 복음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배경적 조건일 뿐, 자체적인 향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국가와 민족이 강성해진 데 만족하고 의존하는 정서가 일반화된 요즘, 복음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식어가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울 따름이다. 

한산: 용의 출현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 등장하는 귀선(거북선).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