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꾸중은 '아랫사람의 잘못을 꾸짖는 말'이라고 합니다. 사전적 정의의 '잘못'과 '꾸짖는 말'을 분석하면, 결국 꾸중은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또 '훈육(訓育)'은 가르친다는 뜻인데, 이 말을 자주 쓰는 곳은 학교와 군대, 교도소 같은 단체입니다. 훈육의 목적은 행동을 억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통상 요구되는 규칙이나 규범, 질서를 배우게 하는 의미 외에도,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조절하는 힘을 기르게 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흔히들 교회에서는 꾸중이나 질책을 하지 말고, 용서와 사랑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있지요. 그래서 요즘은 가정뿐 아니라 학교, 사회에서 '꾸중'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모두들 칭찬과 격려에만 치중하다 보니, 정작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하는 힘이 차츰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필자는 꾸중은 분명 필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자녀들이나 아랫사람에게 꾸중을 할 경우 모욕적 언사와 잔소리를 반복하는 일은 절대 삼가야 하며,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합니다. 많은 대중 앞에서나 그의 친구들 앞에서는 피해야 합니다. 별다른 효과 없이, 오히려 깊은 상처만 남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부모나 교사, 선배, 직장 상사, 군대 상관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꾸중하는 경우, 오히려 듣는 이에게 마음의 상처만 안겨 주고 본래의 목적은 상실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해서 무조건 칭찬만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칭찬과 꾸중을 적절하게 혼합하여 사용하는 기술을 배우고 터득해야 합니다. 이 시대의 가정에서는 자녀들에 대한 꾸중과 질책, 그리고 훈육이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자녀들의 눈치 보기에 급급, 자녀들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 줍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맹목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교회와 사회의 앞날에 많은 부담을 안겨 줄 수 있습니다.

성경 속 많은 인물들도, 꾸지람 없이 그 믿음이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꾸중에 냉대했던 인물들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반면 귀를 기울이고 마음 깊이 회개하며 겸손하게 대처했던 인물들 중에서는, 비록 잘못이 있었더라도 하나님께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고 훗날 모범적인 백성으로 이름을 남긴 분들이 많습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은혜의 시대가 펼쳐졌음에도, 서로를 의심하고 시기와 모함으로 얼룩진 모습들이 특히 교계 안에서 흔히 이뤄지고 있어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특히 꾸중에는 마음문을 열고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단이 왕이었던 다윗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가 질책성 꾸중을 했더니, 다윗은 겸손으로 고요하게 가슴 깊이 인정하고 회개함으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으로 남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목사님들은 성도가 반복적으로 잘못을 할 경우 분명 꾸중을 해야 합니다. 목사는 하나님께 명을 받은 영적 지도자입니다. 성도의 눈치를 보거나 환심을 사기에만 급급하면, 그곳은 곧 지옥의 장으로 변하게 됩니다. 성경에 위배되거나 사회적으로 옳지 않은 일을 한다든지, 공금을 횡령한다든지, 특히 부동산 사업을 하는 분들이나 상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이나 공직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의 삶이 정직하지 않다든지 하는 경우 과감히 질책하며 꾸중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귀의 역사에서 춤을 추는 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꾸중은 곧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길인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냉철히 바라보면, 어린 시절 목사님들께서 꾸중하시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움으로 다가옵니다. 그 꾸중의 말씀들이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한 굳건한 반석이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 시절 꾸중하시던 그 음성이 있었기에, 이 나라에 무수한 인재들이 배출되어 훌륭하게 하나님과 세상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와 교사, 목사, 그리고 여러 지도자들의 헌신적인 행동과 눈물 어린 기도의 힘만이 성공적인 꾸중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잔머리로 가득 찬 교인들도 있는데, 그들 때문에 많은 상처가 일어남을 깨닫고,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잠 2:11)",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8)",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

성경은 이렇듯 자녀들을 훈계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징계는 일시적으로 자녀들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지만, 그들의 나쁜 행동이나 어리석은 태도를 바로잡아 주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사랑의 행위가 됩니다.

특히 성도에게 들려 주고 싶은 말씀은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1:1)"입니다. 화폐가 생기기 전에는 저울로 상거래를 하다 보니, 두 종류의 추를 교묘하게 사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팔 때는 가벼운 추를 저울에 놓고, 살 때는 무거운 추를 놓으면서 많은 이익을 챙겼던 것입니다. 그 이후 화폐가 발행됐지만, 인간의 무거운 탐욕으로 인한 거짓과 권모술수가 오히려 만연했습니다.

어떤 남집사님은 자동차 중개상을 하면서, 한 여집사님을 대상으로 사기에 가까운 가격으로 중고차를 판매해 그 집사님의 가슴에 상처를 준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 여집사님은 남편이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어렵게 홀로 두 아이를 키우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 안에 많은 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설마 같은 교인끼리 거짓말을 할까' 싶어 믿고 구입했는데, 뜻밖의 배신에 가슴 아파했던 모습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자신의 행복한 삶을 위해 이웃을 괴롭히는 일은 교회 안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에게 거짓으로 영업을 한다면, 세상에서는 오죽하겠습니까? 이러니 교인들이 세상에서 욕을 먹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요? 이 모두는 교회 지도자들의 수수방관과 안일함, 그리고 질책과 꾸중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그 틈을 이용하여 활개를 치고 있음을 가슴 깊이 슬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정말 성도와 자녀들을 사랑한다면, 무서운 꾸중이 함께해야 할 것입니다. 꾸중이 없는 발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므로 실수와 모순이 있기에, 꾸중은 반드시 필요한 호흡과도 같은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사랑의 꾸중을 실천할 것을 1천만 기독교인들은 가슴으로 받아들입시다. 꾸중은 곧 나를 더욱 성숙하게 만드는 '잠언'입니다.

/이효준 장로(부산 덕천교회,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