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릭사이드 교회 김칠곤 목사
 크릭사이드 교회 김칠곤 목사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문화와 언어는 너무나 다양하고 독특하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인 유산은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타 문화를 알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기에 정말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이러한 가치를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나라를 떠나 타국에서 사는 이민자들이다. 이민자들의 삶은 자국에서 사는 사람들보다 많은 불편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이유는 새로운 세계에서 끊임없이 도전하며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 문화에 적응하면서 그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만 생존할 수 있다. 이와 반면에 타 문화에 잘 적응하며 살아간다면 한 언어와 한 민족과 같이 살아가는 것보다는 많은 장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에 살든  누구나 살아가는데 있어서 육신의 한계를 가지고 살아간다. 이것에 대해 성경에서 정의 하기를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리이다"(시90:10) 사람의 제한된 수명 때문에 세상에서 많은 것을 보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인생은 너무나 짧고 빠른 속도로 안개와 같이 지나간다. 인간은 누구나 나이를 먹어가게 되는데 자신들의 모습 보다는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이 달려가는 속도가 60, 70, 80 마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급속도로 달리는 상황 가운데 언젠가는 자신들이 사랑하고 존경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인간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인생의 허무함을 알게 된다.

지난 12월초 언제나 필자의 사무실에 와서 1주일에 한 번씩 쓰레기 통을 비워 주시는 딕이라는 미국교인의 아내 글라디아가 오랜동안 양로원에 거주하다가 소천하여 장례식 예배에 참여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장례식 예배에 참여하는 동안에 다양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떠나는 사람을 보내는 슬픔,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마음의 아픔과 영원한 천국에 가면 다시 볼 수 있다는 그리움과 같은 것이었다. 소천하신 글라디아 씨의 장례식 예배를 드리는 날이 그분의  78세 되는 생일이었다. 그 이유는 그 분의 자녀들과 남편이 장례식 예배의 날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사실 글라디아 씨가 소천한 날짜는 11월 중순 경이었다. 그런데 가족들의 동의 하에 글라디아 씨를 위한 장례식 예배를 그분의 생일 날짜로 맞춘 것이다. 그래서 장례식 예배의 마지막 부분에 소천 하신 분을 위해 모두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동양인 문화로 볼때 장례식 예배는 슬퍼야 하는데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본 필자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한 인간의 죽음이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답운 것을 보았다. 비록 육신은 땅에 묻힌다 해도 그분의 영이 천국에 가는 길에도 얼마나 많은 축복을 사람들로 부터 받고 가는지 그 분은 이 세상에 살 때 참으로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례식 예배 가운데 그분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이 나와서 그분에 관한 삶을 나누게 되었다. 그 중에 감동적인 부분의 하나를 들자면 유아 때 부터 그분을 통해 교회에서 성경 말씀을 배웠고 "나를 손자 처럼 늘 여기었으며 어디서나 나를 볼 때 마다 꼭 껴않아 주었다."는 것이 었다.

그러한 분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나눔에 그를 보는 필자도 눈가에 눈물이 맺히게 되었다. 하지만 장례식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설교자의 메세지는 너무나 귀한 것이었다. 그의 메시지의 핵심은 "삶은 영원하다"는 것이었다. 구원받는 자의 죽음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육체가 가지는 졸업장이다는 말이다. 그리고 천국에서 늘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영원히 사는 것이다. 이러한 메세지를 담아놓은 찬양을 찾아 본다면 그것은 "어노인팅"이다. 그 가사를 보면 "영원한 사귐에 날 초대하시네 주님을 누리며 사는 것, 날 지으신대로 날 부르신대로 주님과 함께 걷는 삶, 이것이 영원한 삶, 이것이 영원한 삶, 참 하나님과 그 아들 아는 삶, 이것이 영원한 삶. 이것이 영원한 삶, 내가 주 안에 주는 내안에 거하는 삶" 이러한 영원한 삶은 이세상에 제한된 육신의 삶을 사는 동안에도 주님을 찬양할 뿐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세계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살 것이다.  그 찬양은 아마도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찾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내주 예수 세상에 다시 올때 저 천국으로 날 인도하리 나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며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라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영원히 주님의 세계를 찬양하며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으로 부터 구원함을 받은 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귀한 축복이다.

세상이 바라보는 인간의 세계의 정점은 죽음이다. 그래서 육신의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육신의 죽음을 세상은 슬픔으로 여길 뿐 아니라 죽음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때문에 인간이 살아가면서 병이 들고 늙어가는 것을 소망이 없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 말하는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이며 영원한 시작이라고 말을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이시며 완전하시고 흠이 없으신 주님이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들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신 표징으로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 하신다. 하나님의 원수이자 인간의 삶을 늘 절망과 좌절 그리고 갈등의 어둠속에 가두어 놓기를 바라는 원수인 사탄은 인간의 마지막을 죽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은 죽으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잃는 것 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의 삶은 육신의 죽음에서 모든 것이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은 곧 영원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시작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구원함을 받은 자의 영을 원수는 더 이상 죽음에 가두어 둘 수 없다.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이전에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 낳은 것이다. 아담은 처음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에덴 동산에서 살았지만 그는 하나님이 약속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 먹음으로 영원히 죽게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이다.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하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3:17) 이것으로 인해 아담은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담의 모든 후손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런데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시어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죄를 사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시게 하신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한 죄인된 인간을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며 이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된 자에게 주어지는 삶의 축복은 영원히 사는 것이다.   

크릭사이드  한인교회 김칠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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