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흔히 성도들은 누군가 못된 짓을 하거나 자기 뜻에 거슬리면, "마치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가룟 유다보다 더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깨닫지 못하는 분들이 마치 천사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이를 바라보면,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우릴 향해 기도하시던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

'유다'라는 이름은 '찬송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이름 앞에 붙은 '가룟'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출신지'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열두 제자 중 다른 제자들은 몰랐지만, 사도 요한은 유다가 돈궤를 맡아 일할 때 도적질을 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물론 예수님도 아셨겠지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으며, 그런 유다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으시고 덮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다는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한 채 여전히 돈에 눈이 멀어, 은 삼십에 예수님을 넘겨 주는 뼈아픈 최대의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때마침 대제사장, 장로,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잡아 죽일까 고심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가룟 유다가 등장하여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문제를 해결해 준 것입니다. 유다는 돈과 권력과 욕망에 눈이 어두워 자신의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 안 성도들도 쉽게 사탄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특히 가룟 유다는 돈궤를 맡을 정도로 주님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제자였습니다. 그는 어부 출신 등의 다른 제자들보다 교육을 더 받은 인물로, 열두 제자들 중 가장 똑똑한 인물이었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였지만, 사탄에게 틈새를 허용함으로 뼈아픈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의 죽음은 실로 신앙의 정절을 지키지 못한 대표적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가룟 유다처럼 될 가능성은 존재합니다. 지금도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 온갖 추악한 모습으로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가룟 유다에게는 인간적인 양심은 있었습니다. 스승을 팔아넘긴 것을 후회하며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많은 죄를 짓고 실수하였지만, 자살을 선택하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그 차이인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자살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께 참회를 했더라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비록 그는 잘못을 후회했지만, 회개의 방법이 다른 제자들과 달랐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흔히 사용되는 자살을 시도했기 때문에, 멸망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지난날 교회에 다니던 재벌과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들도 모두 잘못된 믿음이 낳은 안타까운 사건들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왜 스승인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넘겼을까요? 유다의 '실패한 삶'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은 채, 끝까지 주님이 자신의 기대와 욕망을 채워 주기를 간절히 열망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 볼수록, 자신의 기대가 허물어져 가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들이 고난과 죽음을 향해 가면서 세속적 인기와 힘을 잃어가, 유다 자신이 꿈꾸고 갈망하는 왕국의 회복은 차츰 멀어져 갔습니다. 그는 회의를 느꼈고, 절망과 함께 스승에 대한 배신감에 극도로 마음이 불안해졌고, 이는 분노로 이어져 결국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한때 사명감에 불타 뜨거운 열정으로 온갖 어려움을 감내하며 주님의 일에 동참했지만, 그 열정이 식어버린 채 직분을 맡고 있지는 않는지요? 현재 나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지요? 교회에 한 발만 걸치고 나오는 외발잡이 성도는 아닌지요?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집사나 권사, 장로, 목사에 이르기까지, 교회 밖에서 물끄러미 안을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먼저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교회 밖에서 길을 잃은 채 주위를 맴돌고 있다면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의를 굽게 한다든지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며, 주님 앞에서 모두가 형제자매임을 기억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찾기 전 우리를 찾으시는 줄 아셔야 합니다. 만약 교만으로 주님과 맞서려고 한다면, 결국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 가운데 기쁨과 겸손함으로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주님께서는 우릴 향해 손을 내미십니다.

가룟 유다는 실패의 사람입니다. 우리도 가룟 유다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신은 아니라고 하지만, 물질과 권력, 교회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다 누리며 신앙생활을 한다면, 오히려 가룟 유다보다 못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이뤄내신 그 일들을 하나하나 묵상하며 실천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가룟 유다는 바리새인들에게 받은 은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되돌려 주는 신앙인들이 드뭅니다. 그 되돌려 줌이란 무엇일까요. 성도의 가슴에 상처를 주었을 때, 그리고 교회에서 중대한 과실이나 범죄행위를 했을 때 진정한 사과를 하는 그것이 바로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누군가 용서를 구하면, 모두 힘찬 박수로 포용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절대로 편견을 가져선 안 됩니다. 항상 정의롭고 평등하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며, 그리스도께서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이웃을 배려하고, 실수를 용서하며,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하며, 함께 나누는 행복한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를 주님께서 원하고 계십니다. 더구나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내 이웃이 아니라, 바로 내가 가룟 유다인 것도 함께 아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