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
조덕영 박사.

신학과 진화론

현대 세속 과학의 우주 기원과 생명관은 분명 진화론에 주로 그 뿌리와 근거를 두고 있다. 진화론이야말로 설득력 있는 과학의 사실이라는 데 주로 근거를 두고 세속 과학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신학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신학자 존 맥쿼리(John Macquarrie)는 "이 지구상 진화의 과정은 미리 잘 짜여진 계획을 실현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보다, 시행착오 속에서 여기저기를 더듬으며 수많은 낭비(waste)를 남기고 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신정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 말은 "진화는 되고 있으나 늘 유익한 방향으로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라 주체(진화되어 가는 주체)와 객체(진화되어 가는 주체가 경험하는 주변의 모든 상황) 사이에는 달갑지 않은 상황(일종의 악한 상황)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진화는 악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여기서는 주로 진화론의 윤리적 입장과 관련하여 이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한다. 진화론적 윤리학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다음의 4가지 관점으로 살펴 볼 수 있다.

적자생존과 악

첫 번째 개념은 생물학적 진화론의 원리를 논리적 외삽(外揷, extrapolation)을 통해 윤리학의 영역으로 가져온 윤리학의 체계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투쟁, 경쟁, 선택, 생존과 멸종의 개념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생물학을 넘어 대단히 윤리적이다. 즉 진화의 과정이란 오직 가장 적합한 것만이 가장 잘 살아남는다는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 이 같은 적자생존에서는 필연적으로, 생존을 위해서는 어떤 윤리적 질서도 없이 오직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 그 과정은 배려와 양보가 아닌, 투쟁 가운데 오직 자신의 개체만이 우월적 생존력을 획득하게 되는 무자비한 승리만이 필요할 뿐이다. 이것은 모든 질서의 주인을 창조주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성경적 창조론에 부합하지 않는다. 

도덕적 본성과 진화

두 번째 개념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이 진화되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윤리는 사회적으로 학습된 행동, 즉 사회적 자각을 통해 선택을 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될 때부터 시작된다. 이 개념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이 진화의 발달이 아닌 하나님의 특별 창조에 의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닮았다는 성서적 관점에 대해 대답해야 한다. 진화는 목적성도 방향성도 없으므로 당연히 도덕성도 없다. 진화론자들은 결국 진화윤리가 다분히 상황윤리적임을 설명한다. 그 상황윤리에도 기준은 전혀 없다. 즉 불변의 토대(constant ground)가 없다. 진화의 원리에는 당연히 선과 악의 구분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진화론적 윤리가 진화의 과정을 통해 인류가 스스로 도덕의 가치도 만들어 왔다고 보는 데 반해, 창조론적 윤리는 모든 물질의 창조는 선하다는 데서 출발한다(창 1장). 창세기의 기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기록함으로, 창조론적 윤리와 가치의 규범 틀을 제공한다. 특별히 인간은 피조물 가운데 선하신(사랑이신, 요일 4:8)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랑의 하나님을 가장 닮은 존재이다.

물질과 인간의 육체는 본질적으로 선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인간에게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진화의 투쟁과 적자생존은 아무래도 선하신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부합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진화론자들은 생명이란 다분히 '지극히 낭비적이고, 기계적이며, 미래지향적이지 못하고, 비인간적인 과정'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컨텍스트(상황)만을 가지고 바라보는, 지극히 위험한 사고가 아닐 수 없다.

고통의 의미에 대해 깊이 연구한 손봉호 박사는 "과잉 괘락은 불필요한 고통을 요구하고, 그 고통이 반드시 그 쾌락을 누리는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과소비가 환경을 오염시키고, 누군가가 그 때문에 병들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절제는 자원(自願)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고, 윤리적 행위의 기본이다. 그는 조그마한 절제가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을 조금이나마 정의롭게 바꿀 수 있음을 내다보았다. 인간만이 가진 윤리적 특이성이다. 적자생존(適者生存),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진화 윤리학에서는, 과잉 쾌락이 가져다 주는 이웃의 불필요한 고통에 대한 이해나, 자원해서 이웃과 나누는 사랑과 절제의 미학이란 있을 수 없다. 

윤리적 개념은 진화하였는가?

셋째 개념은 인류 역사를 통한 인간윤리체계의 발달과 연관된다. 여기에는 윤리가 더 좋은 쪽으로 진보한다는 개념이 들어 있다. 이 개념은 사람이 하등한 윤리 의식을 역사를 통해 고등한 윤리로 진화·발전시켜 왔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타락과 윤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관련되어 결과한다는 기독교적 관점과 상치된다. 하지만 진화론적 관점에서는 선과 악의 개념조차 윤리적 발달 가운데 부각된 개념에 불과할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해 도킨스(R. Dawkins, 1986)는 "진화에 있어 자연선택이란, 단순히 '눈먼 시계공'(blind watchmaker)에게 맡겨진 시계의 운명과 같다"고 본다. 하지만 시계공이 맹인이었다면 그 시계는 온전히 고쳐질 수가 없다.

우주의 고장난 시계는 우주의 주인만이 근본적으로 수리할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이 정말 존재한다면, 창조주를 무시하는 '눈먼 시계공'은 창조 질서를 이탈한 지구 전체 운명의 쇠락조차를 전혀 예견할 수 없다. 즉 창조주 하나님을 제외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진화론은, 윤리 체계의 발달이란 그저 진화의 단계에서 생존에 급급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인류의 한 윤리 형식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렇게 진화론적 윤리학이 윤리적 가치의 발달을 주장하는 데 반하여, 창조론적 윤리는 피조물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라고 말한다(시 19:1-6).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라고 하였다. 창조는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낸다. 자연은 일종의 하나님의 현현(顯現)이요 구현(具顯)이다. 진화론자들이나 진화 윤리학자들이 진화와 하나님의 영광을 한 지평 아래에서 해석을 시도한 경우는 전혀 없다. 선악의 구분조차 없이 '눈먼 시계공'에게 맡겨진 인류의 운명에 무슨 하나님의 영광이 있겠는가!

인간은 필요한 윤리를 채택하여 왔는가

넷째 진화론적 윤리학의 개념은 채택에 적당한 진화체계의 본질을 강조한다. 사실 이것은 글로 이해된 일반적인 진화론과는 다르다. 오히려 이러한 윤리체계는 규범적 상태로의 윤리체계가 아니라, 역동적이며 알맞은 가치체계와 관련된다. 오직 채택할 만하고 적합한 진화론적 윤리학의 개념을 말하고 있는 이 4번째 개념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진화의 개념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단순한 진화론적인 진보적 발달을 말하는 게 아니고, 인류가 윤리적 체계에 있어 역동적이며 알맞은 본질을 채택해 왔다는 것 자체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 선과 악도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진보적 발달 속에 필요할 때마다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 선악의 기준이란 없다. 즉 이것도 상황적 윤리이다.

이렇게 진화론적 윤리학이 인간이 역동적으로 필요한 윤리를 채택해 왔다고 보는 데 비해, 창조론적 윤리학은 궁극적으로 타락과 범죄로 파괴되어버린 하나님의 질서의 회복에 관심을 둔다. 진화론적 윤리학이 다분히 상황적인 데 비하여, 창조론적 윤리학은 절대적이다. 그 절대적 윤리로의 회복에 관심을 둔다. 창조론적 윤리는 그 회복된 양심의 기준을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찾는다(요 1:14). 이안 바버(Ian Barbour)는 기독교가 과학과 기술을 지구에서 인간과 환경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방향으로 돌이키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즉 성서 전통은 모든 창조물들을 존중하고 미래 세대에 관심을 갖는 윤리에 크게 공헌하는 방향으로 인류를 유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양심은 당연히 우주적 회복된 윤리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렇게 진화론적 윤리학이 악도 진화 과정의 산물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는 면에서, 선악에 대한 불변의 토대를 가진 성경의 본질과는 그 궤도를 달리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