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뭔가에 잔뜩 화가 난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 대체 사람들은 뭐 때문에 잔뜩 화가 나 있는 걸까? 아침 출근 시간부터 저녁에 퇴근해서 올 때까지. 얼굴에 웃음이 사라진 채.

사람들을 울화통 터지게 만드는 원인이 도대체 뭘까? 어떤 사람은 지인들과 더불어 계를 했다. 꼬박꼬박 곗돈을 잘 내왔다. 그런데 어느 날 계를 주도하던 사람이 돈을 떼어먹고 도망가버렸다. 너무너무 화가 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도망간 계주를 잡기 위해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 그리고 '잡아서 그냥 놔두지 않겠다'고 찾아 나섰다. 자신의 생활을 내팽개치고 가정도 내버려둔 채. 그런데 찾을 수 없다. 얼마나 꼭꼭 숨었는지. 그래서 화병에 걸렸다. 잃어버린 돈 때문에 마음에 타오르는 불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

대학생 시절부터 애완견을 키워온 20대 아가씨가 있다. 정이 드니 가족이나 다를 바 없었다. 애완견이 나이가 많아지니 병치레가 잦아졌다. 시름시름 앓던 애완견이 어느 날 병사했다. 그 뒤 아가씨는 충격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애완견을 품에 안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애완견과 함께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몇 년 동안 함께 살아온 애완견을 잃은 아픔과 슬픔을, 목숨을 끊는 것으로 끝냈다. 너무나 아끼고 사랑했기에.

내가 살고 있는 빌라 옆에 자그마한 화단이 있다. 거기에 몇몇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여름이면 길을 오가던 연세 드신 어른들이 힘들다고 화단 옆에 쌓은 벽돌에 앉아 쉬곤 한다. 나무 그늘이 있어 안성맞춤이다.

어느 날이었다. 수요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데 화단이 훤했다. 위층에 살고 있는 분이 화단에 있는 나뭇가지를 잘라냈기 때문이다. 그 광경을 지켜 본 아내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저런 식으로 자르냐? 자르려면 예쁘게 자르든가. 위 둥치를 싹 잘라버리면 어떡해!"

아내는 너무 속상했던지 그 뒤로 며칠 동안 입에 담곤 했다. 어느 날 푸념하는 아내에게 말했다. "뭘 그런 걸 갖고 그렇게 아까워하냐?" 아내는 화단에 자라는 나무 때문에 며칠 동안이나 속상해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요나 같지 않은가? 하나님의 선지자 요나는 원수 나라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게 싫었다.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마저 거부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것을 인간이 거부할 수 없다. 결국 니느웨로 가서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셨다.

그러자 요나는 화가 났다. 차라리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낫다고 떼를 썼다.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고 앉아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바라보기로 했다. 하나님은 요나를 위해 박넝쿨을 주셨다. 그늘이 생겨서 매우 기뻤다. 그런데 이튿날 새벽에 벌레를 보내어 박넝쿨을 갉아 먹었다.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게다가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동풍까지 예비하셨다. 기절할 정도로 너무 힘들었다. 요나는 짜증을 내면서 또다시 죽기를 구했다.

요나는 박넝쿨 때문에 화를 냈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박넝쿨을 위해 요나가 한 게 뭔가? 수고도, 재배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박넝쿨이란 게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릴 수 있는 게 아닌가? 결코 영원한 게 아니다. 그런데 사라질 게 사라졌는데 뭘 성질을 부리고 있단 말인가? 요나가 박넝쿨이 아까워서 화를 내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서 화내시는 건 왜 모르는가? 하나님이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아끼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거기에 있는 수많은 생명들을 아끼는 하나님의 마음을 왜 모르는가? 이방인이라고 아무 상관이 없는가?

요나는 선지자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몰랐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들을 아끼시고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죄인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내주셨다.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마다하실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최근 이수만 씨 부인이 소장암으로 투병하다 결국 세상을 달리했다. 암이 최초로 발견된 것은 2012년 12월이었다. 2013년 1월 대수술을 받았다. 이후 항암치료를 계속해서 받아왔다.

이수만 씨는 아내의 발병 직후부터 임종 직전까지 매일 밤낮으로 병상을 지키며 극진히 간호해 왔다. 무척이나 사랑했기에. 그런데 암이 재발했다. 결국 2년간의 힘든 투병생활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떠나야만 했다. 2014년 9월 30일, 아내는 남편의 곁을 떠났다. 아내를 그렇게 사랑했던 남편의 마음이 얼마나 허망하고 아플까?

우리가 '아끼고 사랑하는 것들'은 결국 우리 곁을 떠난다. 우리가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들'도 언젠가 우리 곁을 떠난다. 아깝다는 생각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화가 치밀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게 있다. 비록 그들이 우리 곁을 떠난다 해도, 예수 믿고 천국을 기업으로 물려받을 수 있다면, 화낼 것 없다. 그들은 더 좋은 세계로 가게 되니까. 이 땅에서 누릴 수 없는 영광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천국을 갈 수 있도록 전도해야 한다. 뒤늦게 땅을 치며 후회하지 않도록.

다시 한 번 질문해 보자. 나는 지금 뭣 때문에 화내는가? 바울이 배설물처럼 여겼던 '해 아래 것'들 때문에 화내고 있지 않는가? 전도자는 헛된 것이라고 누누이 말하고 있건만. 부질없는 것들인데.

우리에게 잃은 양 한 마리 때문에 산과 골짜기를 헤매는 목자의 마음이 필요하다. 한 영혼 때문에 화낼 줄 아는 영성이 필요하다. 사단이 그들을 집어 삼키는 것 때문에. 죄로 인해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사람들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