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아무리 좋은 자식도 부모 마음 못 따라간다."

평소에 내 마음 속에 간직한 생각이다. 좋은 자식 노릇 좀 하고픈데, 도저히 어머님의 마음을 따라 잡을 수 없는 내 모습.

아련히 생각난다. 어릴 적 초가지붕 아래 살던 때가. 술로, 도박으로 세월을 보내시던 아버지 대신 어머니는 늘 밭일, 장사하는 일에 여념이 없으셨다. 마음이라도 좀 편하게 지내셨으면 좋았으련만, 시어머니 구박, 시동생들 말썽, 7남매 어린 자식 뒷바라지까지. 추운 겨울 시냇가에 손 담그고 빨래하던 어머님의 시린 손. 잊을 수가 없다. 아..., 그래서 지금도 어머님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그런데 벌써 81살이나 되셨다. 내 곁에 언제까지 살아 계실까. 어쩌다 한 번씩 시골을 내려가면 어머니 홀로 두고 오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어느 새 내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어서 한참 동안 감추어야 한다.

"어머님, 서울로 함께 가서 살아요."

"난 갑갑해서 서울에 못 산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어머님의 속내를. 아들의 목회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해서. 아들이 어머니 신경을 쓰느라 목회에 전념하지 못할까 해서. 그 속내를 다 알기에 나는 더 가슴이 시리다.

"어머님, 목사가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면 성도들에게 아름다운 본이 될 거예요. 함께 가요."

그래도 어머니는 싫단다. 그런 어머니 마음을 자식이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으랴.

몇 개월 전이었다. 우리 부부가 어머님 댁을 갔다. 짧은 만남 후 헤어져야 하기에, 저녁 시간 함께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으신가 보다. 끊임없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셨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늘 혼자 계시니까.

한참 후 어머니는 장롱을 뒤지셨다. 그러더니 봉투를 하나 꺼내신다. 그리고 아내에게 내미셨다.

"어머니, 뭐예요?"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어머님이 손자손녀를 위해 돈을 챙기신다는 걸.

"막내 대학을 가는데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했다.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머니, 이러지 마세요. 제가 늘 죄스러운데...."

내 나이 52세. 어머님에게 이런 돈 봉투를 받다니? 싫다고 돌려드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제 힘든 몸으로 읍내에 있는 우체국까지 걸어가셔서 이 돈을 찾아 놓으셨다. 그러니 돌려받을 수 있을 손가?

왜 이렇게 자식의 마음을 부끄럽게 하시는지? 염치 없는 자식으로 만드시는지? 자식의 눈에 눈물을 빼시는지? 이게 부모님의 마음이니, 내가 어찌 따라잡을 수 있으랴. 아무리 따라갈래도 따라잡을 수 없는 어머님 마음. 그저 부끄럽고 죄송할 따름이다.

엊그제 아내와 큰 딸, 셋이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아내는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이것밖에 없는데, 4-5개씩만 먹자."

지난번 먹다가 남은 삼겹살을 구운 모양이다. 그래서 아예 배분을 해 주었다. 그런데 나는 상추만 싸먹었다. 아내가 보고 말했다.

"당신도 먹어."
"아니야, 난 먹고 싶지 않아."

"혜린이 먹으라고 그러는구나. 너무 많이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단 말이야. 그러지 말고 당신도 먹어."

그러나 난 끝끝내 상추만 싸먹고 수저를 놓았다. 딸이 맛있게 먹는 게 나의 행복이니까. 딸이 행복해 하는 게 내 행복이니까.

세 아이의 아빠 노릇을 하다 보니 자식 노릇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늘 죄송하면서도 마음만 그럴 뿐이다. 내리사랑이라고, 이렇게 하다가 어머님이 우리 곁을 떠날 때 내 마음엔 얼마나 회한이 될까?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께 순종하여 마지막까지 사명을 잘 감당하셨다. 뿐만 아니라 육신의 부모에게도 순종하고 공경하셨다(눅 2:51). 마지막 인류의 구속을 눈앞에 두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흘리신 주님, 그때도 아들의 자리를 지키셨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육신의 어머니를 공경했다면,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십자가에 죽으시는 고통의 순간에도 요한에게 어머니를 당부하신 예수님. 그런데 우리가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댈 변명거리는 없다.

예수님은 깊은 슬픔과 아픔에 빠져 있는 어머니 마리아를 쳐다보셨다. 어머니의 아픔을 읽고 계셨다. 만지고 계셨다. 그리고 그의 암담한 미래를 신실한 제자 요한에게 당부했다.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님처럼 정성스레 봉양했을 것이다.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우리 눈에 먼저 슬픔과 아픔에 잠긴 부모님의 모습이 보여야 한다. 움푹 패인 잔주름. 거친 손마디. 굽은 허리. 부모님의 굽은 허리는 나를 업어 키운 사람의 증표다. 닳아빠진 무릎 관절은 학비 대느라 논바닥과 밭에서 기어 다니며 일하신 흔적이다. 다 빠진 치아는 이를 악물고 일한 결과이다. 그러니 내 어이 부효의 길을 생각이나 할 수 있으리!

어느 나라에 이웃 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사신은 말 두 필을 가져와서 문제를 냈다. "암말 중에 누가 어미이고 새끼인지를 맞혀 보시오!"

그런데 두 말이 너무 비슷해서 도저히 분간이 안 된다. 자존심 문제이니 물러설 수 없다. 그래서 한 신하가 나이 많은 아버지를 찾아가서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 문제를 간단하게 풀었다.

"여물통 2개를 갖다 놓고 먹는 것을 보면 안다. 먹이를 줬을 때 계속 먹으면 새끼고, 먹다가 여물통을 옆의 말에게 밀어 주면 어미이니라."

자식과 부모는 이렇게 다르다. 자식은 자기 먹을 것부터 챙긴다. 그런데 부모는 자식 먹으라고 배고픈 것도 참는다. 먹는 척할 뿐이다. 부모님은 당신을 이렇게 키웠다.

정말 어려운 시대를 살아오신 분들이다. 우리가 겪는 고통과 아픔보다 훨씬 더 큰 아픔과 상처를 갖고 살아오신 분들이다. 언젠가 우리 곁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땅을 치며 통곡할지도 모른다. 그날이 다가오기 전에 한 번 더 공경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

부모로부터 뼈아픈 상처를 받은 자녀도 있다. 그래서 오랜 세월 풀지 못하고 가슴앓이할 수도 있다.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자신 때문에 너무 괴로워할 수 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그런데 난 조심스레 말하고 싶다.

"넌 안 그럴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