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
조덕영 박사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창 10:1-2)

두발 후손들의 정착지

야벳의 후손 두발(Tubal)은 일반적인 야벳족의 주류가 옮겨간 지리적 행로를 따라 정착하였다. 야벳 일족은 셈족·함족과 달리 바벨탑 분산 사건 이후 다시 인류 제2의 고향 아라랏산 방향을 따라 이동한다. 그런 점에서 두발족의 이동 경로도 같은 야벳 계열인 고멜(유럽, 독일, 터키, 아르메니아 등)과 마곡(스키타이), 그리고 마대(현 이란의 북부)의 행로와 닮았다. 요세푸스는 두발의 땅은 로만 이베리아(Romans Iberia)라고 불렸다고 말한다. 현재는 (구소련 연방인) 그루지아 또는 조지아(Georgia)라고 알려진 지역이다. 이베리아는 두발의 땅 말고도 스페인에도 있다. 어원적으로 남·북카프카스어족과 이베리아 반도의 피레네산맥에서 쓰이고 있는 바스크어는 유사성을 보인다. 지역적으로 유연 관계가 없는 이들 두 지역의 언어가 어떻게 유사성을 보이는 것일까? 이 같은 경우는 또 있다. 바로 한국과 일본의 언어와 지역적 유연 관계가 없는 인도 드라비다족의 언어가, 한일 언어와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인도 타밀어와 우리의 언어가 많은 어휘적 유사성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 경로 파악이 쉽지 않은 것처럼, 유럽의 이들 두 <이베리아>족은 유럽의 이베리아인이 카프카스 지방으로 이주한 것인지 카프카스에서 유럽으로 이주한 것인지 이들 사이의 친족 관계는 확실하지가 않고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만 만일 두 <이베리아>족이 같은 뿌리를 가진 것이 분명하다면 어떤 이유로 인해 카프카스 지역에 살던 두발족의 일부가 스페인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는 것이 성경적 해석으로 볼 수 있겠다.

오늘날 조지아 공화국의 수도 이름 트빌리시(Tbilisi)는 두발(Tubal)로부터 파생된 이름이다. 그리고 일부 두발족 일행은 이곳으로부터 코카서스 산맥을 가로질러 북동쪽으로 이주하였는데, 이때 그들 부족의 이름을 따서 강의 이름도 토볼(Tobol)이라 불렸고, 유명한 토볼스크(Tobolsk)시 이름도 여기에 기인한다. 토볼스크는 1587년 카자흐족이 이 도시를 건설하였을 때 시베리아 제2의 도시였다. 오늘날 토볼강은 카자흐스탄공화국 북부에서 시베리아 서쪽 저지대 남서부를 흐르는 1591Km에 달하는 대단히 큰 강이다. 토볼강 합류지점 부근에 있는 이르티슈강 오른쪽 연안에 있는 토볼스크는 16세기 타타르인이 세웠던 시비르한국(汗國)의 수도 이스켈이 있던 곳으로 <시베리아>라는 명칭은 러시아인이 이곳을 <시비리>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따라서 두발족은 오늘날 조지아공화국의 주요 구성원이요 일부는 러시아 남부 시베리아 지역에 걸쳐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이 두발족을 시베리아의 주인인 야벳 후손 메섹족과 더불어 표현(겔 27:13, 32:26, 38:2-3)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두발 후손들의 삶

기원전 1100년 경 앗수르의 왕이었던 디글랏 빌레셀(Tiglath-pileser) 1세는, 다발리(Tabali)라 불렸던 두발의 자손이었다. 요세푸스는 그들의 후손을 도벨리트(Thobelites)라고 기록하였는데, 후에는 이베리아인들(Iberes)로 불렸다. 토볼스크 출신 중 유명한 사람으로는 오늘날 현대 화학의 기초가 되는 주기율표(periodic table , 週期律)와 칼륨 등 새로운 원자들을 발견했던 천재 과학자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멘델레프(1834~1907, Dmitrii Ivanovich Mendeleev)가 있다. 그는 이곳 서부 시베리아 토볼스크 시에서 토볼스크 고등학교 교장의 14명의 자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서쪽 흑해에 접하고 직접 접하지는 않으나 동쪽에 카스피해를 두고 두 바다 사이의 중앙에 위치하면서 유럽과 러시아, 아시아의 경계를 이루는 카프카스산맥 남부에 위치한 그루지아는, 남쪽으로 터키·아르메니아, 남동쪽으로 아제르바이잔, 북쪽으로 카프카스 산맥을 남북으로 두고 러시아와 접하며, 서쪽으로 흑해에 면한다. 그루지아는 교통과 교역의 접경지로서 역사 초기부터 주변국들의 침략과 점령이 끊이지 않았다. 성경이 두발을 노예와 금속제품의 산지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이런 지정학적 위치를 반영한다(겔 27:13).  BC 6세기에 그리스 식민지가 되었고 앗수르와 페르시아의 영향을 거쳐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BC 4세기에 최초의 조지아국으로 독립하였다. 하지만 BC 1세기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AD 330년경에 기독교가 들어와 그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된다. 하지만 그들의 땅은 이후에도 사산조 페르시아, 비잔틴, 아랍, 스키타이, 징기스칸의 몽골·티무르, 터키, 이슬람 등을 통해 끊이지 않는 시련과 핍박의 연속이었다. 최근에는 1918년  5월 26일 제정 러시아로부터 독립하였으나 1921년 볼셰비키 붉은 군대의 침공으로 구소련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두발족 후손 스탈린

이들 조지아(그루지아)인들은 1930년대 스탈린 시대에 크게 박해를 받았다. 그런데 사실 스탈린은 이오시프 비싸리오노비치 주가슈빌리(Iosif Vissarionovich Dzhugashvili,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그루지아(Georgia)의 고리(Gori)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조지아인이었다. 심지어 그의 주일학교 친구였던 마야코프스키가 쓴 자서전에 보면, 스탈린은 모태신앙인으로 성직자가 되려고 선지학교(티플리스 신학교, Seminary of Tiflis)를 다니던 인물이었다. 신앙심이 대단히 두터웠던, 그의 모친 예카테리느는 주일마다 어린 이오시프(스탈린)를 교회로 데려갔으며, 그녀의 가장 큰 소원은 자신의 아들이 정교회의 성직자가 되는 것이었다. 후일 스탈린이 소련의 최고 통치자가 된 후 어머니를 방문했을 때도, 예카테리느는 자신의 아들에게 "사제(司祭)가 되기 위해 좀 더 노력하라"고 훈계했을 정도였다.

스탈린과 진화론

스탈린이 신앙을 버리고 신학교를 뛰쳐나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마야코프스키에 의하면 바로 당시 유럽을 휩쓸던 다윈의 진화론 때문이었다. 다윈의 진화론에 충격을 받고 신학교를 뛰쳐나와 무신론자가 된 스탈린은, 소련의 최고 실력자가 된 이후 과거 그가 조지아의 혁명 지도자였을 때 그를 반대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잔인하게 숙청하였다. 바로 자신의 동족 조지아 사람들이 1차적으로 주된 숙청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주로 독실한 신앙인들이었다. 마치 김일성의 1차 숙청 대상이 바로 자신의 고향인 평양 출신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과 유사하다. 스탈린 치하에서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 Church)는 1930년대의 박해로 말미암아 1930년대 말에는 거의 소멸 직전까지 내몰렸다. 러시아 혁명 당시보다는 적었지만 수만 명의 사제와 수도자, 수녀들이 박해를 받고 살해되었으며, 1937년부터 1938년 사이의 대숙청 기간에만 10,000명의 성직자들이 총살되었다. 대부분 조지아 정교회를 믿는 두발족(조지아족)의 희생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독실한 신앙인이요 두발족인 스탈린의 어머니 마음은 과연 어땠을까?

신앙의 힘으로 버틴 고산(高山)의 두발족

성경에서 이들 두발 후손들은 어떻게 묘사되고 있을까? 성경은 두발족을 그리 좋게 묘사하지 않는다.  에스겔 선지자는 두발을 곡(Gog)과 메섹(Meshech)과 함께 언급하고 있다(에스겔 39:1). 곡은 우리 민족의 주류인 신라, 가야 귀족들과도 가까운 스키타이족인 마곡을 의미하며 메섹(모스크바)은 바로 러시아 슬라브족을 말한다. 결국 두발은 작게 보면 그루지아족이지만, 크게 보면 그루지아 뿐 아니라 메섹과 더불어 토볼강을 중심으로 시베리아 땅을 일군, 오늘날 러시아로 대변되는 슬라브 족의 중심의 한 축을 당당히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 곡의 군대들(곡과 로스와 메섹과 두발)을 긍정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곡을 쳐서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너를 돌이켜서 이끌고 먼 북방에서부터 나와서 이스라엘 산 위에 이르러 네 활을 쳐서 네 왼손에서 떨어뜨리고 네 살을 네 오른손에서 떨어뜨리리니 너와 네 모든 떼와 너와 함께한 백성이 다 이스라엘 산 위에 엎드러지리라 내가 너를 각종 움키는 새와 들짐승에게 붙여 먹게 하리니 네가 빈들에 엎드러지리라 이는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또 불을 마곡과 및 섬에 평안히 거하는 자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에스겔 39:1-6). 이스라엘은 에스겔 시대 뿐 아니라 지금까지 한 번도 곡의 군대를 능가할 국방력을 가진 민족이 아니었다. 아무런 군사 시설도 없고 힘도 없는 이스라엘(겔 38:11-12)이 어떻게 이들 곡의 군대를 이긴다는 것일까?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삼상 17:47). 세상의 악에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세상에 간섭하신다.

이렇게 곡의 군대들의 일원으로 묘사된 두발도 하나님이 간섭하시면 달라진다. 두발족은 약소국가가 되었다. 이후 이들 민족의 역사는 이스라엘처럼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들 민족은 변하였다. 두발의 후손들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핵심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물론 기독교 신앙이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조지아 정교회를 지난 1700년간 유지하여왔다. 오늘날 많이 보이는 교회 건축의 둥근 지붕구조는 두발족 초기 BC 3000년경에 존재했던 원형거주지에서 유래하였다. 이들의 주거 스타일은 16세기 경 종교적 구조물 뿐 아니라 로마와 그리스, 시리아의 건축물 등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둘째는 고산 고원 형태의 그루지아 특유의 산악지형으로 인해 정체성을 유지하기에 유리한 지정학적 특성이 기여하였다. 결국 두발 자손들은 1991년 구소련의 몰락과 함께 그루지아 공화국으로 독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동서남북 문명 통로, 두발 땅(그루지아)의 위치

비록 험산준령에 속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었으나, 그루지아(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는 실크로드와 통하는 주요 도시였다. 남쪽으로 나가면 중국 장안에서 오아시스 실크로드를 거쳐 온 상인들과 타브리즈에서 만났다. 그리고 이 길은 콘스탄티노플로 향하였다. 북쪽으로 나서면 초원 실크로드를 따라 카자흐스탄을 거쳐 아스트라한에서 실크로드 상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길은 발트해를 거쳐 오늘날의 라인강 유역에 닿았다. 비록 외딴 고원 지대에 살던 두발족이었으나 실은 동서남북 모든 문명과 통하는 모든 면에서 깨어있는 민족이었던 것이다.

최근 이 민족은 강대국 러시아와 물리적 충돌을 빚었다. 2008년 8월 그루지아는 친(親) 러시아 성향을 취하면서 지속적 독립 움직임을 보여 온 자치공화국 남오세티야를 침공한다. 이를 핑계로, 러시아는 남오세티야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조지아를 침공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하였다.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와의 전면전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하여, 그루지아에 직접적 군사 지원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프랑스가 중재하여 러시아와 그루지아 양국 사이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그 해 10월 러시아군이 철수한 일이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조지아의 자치공화국인 남오세티야와 압하스의 독립을 인정하고 있어 분쟁의 소지는 여전히 남기고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동서남북 문명 통로에 위치한 그루지아의 지정학적 특성은 규모가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다양하면서도 깊은 숙명적 고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도 오랜 기간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지정학적으로 약소민족의 숙명을 안고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야벳 후손 두발이 세운 핵심 국가 그루지아에게 개인적으로 친밀감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민족과 유난히 닮은 두발족

두발족의 미래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그루지아(두발)족이 유난히 우리 민족과 닮은 것이 많은 민족이라는 점이다. 첫째, 위에서도 설명했듯 지정학적 숙명이다. 우리나라와 그루지아족은 산악 지역이 많고 세상을 호령하기보다는 주로 외세의 침략에 늘 시달려온 약소국가라는 점이 많이 닮았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낀 모습도 많이 닮아있다. 둘째, 음식문화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고 진하고 매운 향신료와 허브와 마늘을 좋아하는 민족이라는 점도 닮았다. 이들 말고도 마늘을 즐기는 유럽 국가가 과연 있던가? 범유럽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마늘을 즐기는 민족이 있었다니 참 반갑고 정이 많이 가는 민족이다. 셋째, 신앙적 연단의 유사성이다. 이슬람과 무신론 공산주의의 핍박 아래서도 전혀 굴하지 않고 오랫동안 꿋꿋하게 기독교 계열의 조지아 정교를 지켜왔다는 사실은 예사롭지가 않다. 비록 기독교 역사는 짧으나 조선 후기 유교 사회와 6.25를 거치면서 믿음의 선배들의 뜨거운 순교의 피가 흐르는 우리 민족과 많이 닮아 있다. 카프카스산맥 북쪽 러시아 영역에 거주하는 북(北)오세티아인들은 이슬람교 수니파(派)에 속하고 일부 소수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아자르인·아제르바이잔인·쿠르드족 등은 이슬람교를 믿기는 하나 남오세티아인들은 동방정교를 신봉하며 이슬람 9.9%, 카톨릭 0.8%, 일부 불신자, 유대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이 조지아 정교회에 속해 있다.

두발-시베리아-한반도를 잇는 커넥션

비록 주변의 러시아나 터키에 비하면 작고 협소한 땅에 자리잡고 있으나 두발족은 조지아 남쪽 고멜 계열의 아르메니아와 더불어 무신론 공산주의와 이슬람 세력을 꿋꿋이 막아선 민족이었다. 강력한 이슬람 세력과 강대국 러시아 그리고 중앙아시아와 유럽 틈바구니의 정중앙에 있는 민족인 두발족 그루지아는 마치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의 틈바구니에서 기적처럼 꿈틀거리는 우리 민족과 너무나 많이 닮은 민족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주류는 분명 수천 년 전 두발의 땅 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까지 들어왔을 것이다. 이것은 (결국은 같은 피를 나눈 두 족속인) 스키타이와 흉노가 사용한 동복의 사용 무대와 빗살무늬토기(즐문토기, 櫛文土器)의 분포 지역과도 동서로 정확히 일치한다. 놀랍게도 빗살무늬토기는 그루지아의 카프카스 산맥 넘어 흑해 연안으로부터 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 김해, 통영까지 이르러 발견되는 독특한 무늬의 토기이다. 이 같은 모든 사실들은 우리 민족과 두발족과의 지리적, 문화적, 정서적 관련성을 짐작케 하는 자료들이 아닐 수 없다. 스키타이(마대족)를 다루면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우리 민족은 셈족 계열 일거라는 막연한 편견만 버린다면 두발의 경우를 보더라도 분명 야벳의 후손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두발-시베리아-한반도를 잇는 커넥션은 앞으로도 지속적인 연구와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사실 한반도 주변 국가들은 과거 우리 민족의 문화적 통로였던 이 실크로드의 재개통에 대해 이미 관심을 갖고 여러 경로를 모색하면서 재조명하기 시작한 중이다. 같은 야벳의 피가 흐르고 많이 닮은 우리 민족과 그루지아 민족, 아르메니아 민족이 함께 더불어 종말의 때 하나님의 등불이 되기를 소망한다.

*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www.kictnet.net)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