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어떤 사람이 가장 위대할까? 나는 단언한다.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다. 가장 가치 있는 삶은 어떤 삶일까? 사랑하는 삶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비참하게 사는 사람은,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이다. 미워하며 사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다.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은 정말 불행한 인생이다. 그렇기에 이제부터라도 미움을 청산하고 사랑 챙기기부터 시도해야 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게 있다. 사랑하며 살고 싶지만, 정작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한때는 '당신 없이는 살아갈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던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외면하고 살아간다. 얼굴을 마주칠까 애써 피해 다닌다. 무슨 원수 맺힌 것이 그리 많은지.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서로에게 불만이 생길 때도 많다는 것을. 서로에 대한 불만족으로 짜증을 부리고 투정을 부린다. 원망과 불평으로 입이 두 발 세 발 나와 있다. 서로 등을 지고 몇 날 며칠 말도 하지 않고 다투고 싸운다. 그러기에 인생을 사는 동안 아주 중요한 게 있다. 바로 사랑 챙기기이다.

분주하게 살다보면 사랑을 챙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서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다 보면 사랑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다가 어느 때엔가 사랑이 너무나 소중한 걸 깨닫는다. 그래서 사랑을 챙기려 하는데, 이미 사랑할 사람이 내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뒤늦은' 사랑 챙기기이다.

"여보, 여보! 불이 났는데 문이 안 열려요. 숨을 못 쉬겠어요. 살려줘요. 여보 사랑해요. 애들 보고 싶어!" 오래 전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들이 주고받은 마지막 통화 내용이다. '세월호' 침몰 사건에도 가족들의 애달픈 고백들이 오고가서 마음을 시리고 아프게 만들었다.

기울어져 가는 배 안에서 아들이 엄마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냈다. "엄마 말 못할까 봐 미리 보내놓는다. 사랑해." 손자가 생사를 알 수 없는 할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할머니, 저 민우예요. 살아계실 거라 믿고 계속 기다릴게요. 보고 싶어요, 사랑해요." 엄마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간 아들을 생각하며 절규한다. "내 새끼 김OO!! 어디에 있는 거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친구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라 생각했지만... 엄마는... 늘 사랑하고 미안하다. 하늘나라에서도 행복해야 해. 천사 같은 우리 아들, 꼭 다시 만나자."

어느 형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동생을 생각하며 문자를 보냈다. "내 동생. 춥고 무섭지. 조금만 더 버텨줘. 널 위해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기도하고 있어. 하루빨리 웃는 얼굴로 만나자. 정말 정말 사랑해.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줘." 한 엄마는 다시는 볼 수 없는 딸을 보내면서 통곡하면서 울부짖는다. "내 딸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새끼! 이렇게 보내야 해서 미안하다. 늘 마음 속에서 함께하자 아가야."

사랑하고 싶어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이들의 애달픈 마음이 담겨 있다. 더 이상 사랑해 줄 수 없기에 가슴을 치며 통곡한다. 아무리 돌아와 달라고 몸부림을 치지만, 죽음의 그림자가 너무나 짙어서 돌아올 줄 모르고 있다. 사랑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허무함을 실감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금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래서 늦기 전에 '사랑해'라고 고백해 본다. 사랑은 인생이 투자할 수 있는 최고의 투자이니까. 사랑에도 때가 있으니까. 뒤늦은 사랑은 무의미하니까.

뒤늦은 사랑 챙기기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세 아이들에게 카톡을 했다.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넌 내게 무척 소중한 존재'라고 말해줬다. 아빠 곁에 있어 줘서 고맙다고. 평소에 표현하던 것과는 다른 마음으로. 세월호 침몰 사건에서 우리는 '공감의 힘'을 경험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우리는 우는 자와 함께 실컷 울었다. 그런들 슬픈 자들의 아픔이 지워지기는 할까마는.

시간이 흘러도 잊을 수가 없다. 침몰한 세월호에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난 이들이 마지막 남긴 한 마디. '사랑해!' 사랑하는 가족의 싸늘한 주검 앞에서 목 놓아 외친다. '사랑해!'라고. 마지막 시신이라도 안아보고 싶은 실종자 가족들이 지쳐서 눈물이 나지 않을 때까지 울부짖는다. '사랑해!'라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곁에 있음에 감사하며 살리라. 후회 없이 사랑하리라. 그러기 위해 '사랑 챙기기'부터 하리라. 뒤늦게 챙기는 사랑은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

나는 강대상에서 자주 사랑의 메시지를 자주 전한다. 설교를 듣고 연세 드신 권사님이 웃으며 말한다.

"목사님, 그래도 전 사랑 못혀유~"
"또 왜 그래요~"
"목사님만 같으면 업고라도 다니겠어요."

너무 무심한 남편에게 상처를 가진 권사님이다. 외식 한 번 하지 않는 남편. 야외로 나들이 한 번 해주지 않는 남편. 그래서 마음속에서 불만이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사랑을 챙기기가 싫다. 아니 사랑할 에너지마저 남지 않았다.

그렇다. 사랑의 한계를 느낄 때가 많다. 때로는 아무리 사랑해도 꿈쩍도 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그 사람. 너무너무 속상하다. '사랑의 한계'를 느끼는가?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전받아야 한다. 죄인인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에 접속해야 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지칠 줄 모르는 사랑을 가능케 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놓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