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한남대 총장
김형태 한남대 총장

나이 많으신 할머니와 어린 손자가 같은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할머니는 이가 많이 상해서 틀니를 만들어 끼셨다. 저녁 진지를 드신 후 할머니는 틀니를 빼내어 칫솔로 잘 닦고 유리컵에 맑은 물을 떠다 깨끗이 헹군 후 입 안에다 끼워 넣었다. 이 과정을 진지하게 쳐다보던 꼬마 손자가 말했다. "할머니, 눈알도 뺐다가 넣어 봐." 그 손자는 할머니가 위대해 보인 것이다. 아, 할머니가 되면 이도 꺼냈다 끼웠다 하시는구나. 몸의 각 부속품들을 맘대로 분해했다 결합했다 하실 수도 있구나. 그렇다면 눈알도 뺐다가 넣을 수 있겠구나....... 얼마나 천진난만하고 창의적인 상상인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보고 느낌 그대로 표현하는 그 무공해의 순수함. 예수님이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그 어린이다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예수의 어린 시절은 "예수는 ①지혜와 ②키가 자라가며 ③하나님과 ④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의 네 단어로 요약된다. 지적 성장(지혜), 신체 성장(키), 종교적 성장(하나님), 사회적 성장(사람)이 균형 있게 이루어졌다. 세상 살면서 많이 오염되고 무디어진 우리들의 가슴과 머리는 어린이의 해맑은 웃음과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통해서 회개하고 반성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차제에 틀니에 관한 또 하나의 이야기(실화)가 생각난다. 대한항공(KAL) 객실 승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서서영 씨의 이야기이다. 10여 년 전 서울발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객실 승무원들이 한 차례 서비스를 마친 후 일부가 벙커(여객기 안에 있는 승무원들의 휴식처)로 휴식을 취하러 간 시간이었다. 서 씨가 승객들에게 더 필요한 것이 없는지 객실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할머니 한 분이 계속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고 계셨다. 뭔가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 서 씨가 다가가 여쭈었다. "도와드릴까요? 할머니,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있으세요?"

할머니는 잠시 아주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서 씨 귀에 대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가씨, 내가 틀니를 잃어버렸는데 어느 화장실인지 영 생각이 나지 않아. 어떡하지?" 서 씨는 "제가 찾아보겠습니다."며 일단 할머니를 안심시킨 후 좌석에 모셨다. 그리고 손에 비닐장갑을 끼고 객실 안에 있는 모든 화장실의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엔 없고, 두 번째도 없고, 마침내 세 번째 쓰레기통에서 서 씨는 휴지에 곱게 싸인 틀니를 발견하였다. 할머니가 양치질을 하느라 잠시 빼놓은 후 잊어버리고 나오신 것을, 누군가가 쓰레기인 줄 알고 쓰레기통에 버린 것이었다. 서 씨는 틀니를 깨끗이 씻고 뜨거운 물에 소독까지 해서 할머니께 갖다드렸고, 할머니는 목적지에 도착해 내릴 때까지 서 씨에게 여러 번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세월이 한참 흘러 그날 일이 서 씨의 기억 속에서 까맣게 잊혀질 즈음, 서 씨의 남자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남자친구와 결혼을 약속, 지방에 있는 예비 시댁에 인사드리러 가기로 한 날이 며칠 남지 않은 때였다. 남자친구는 서 씨에게 "미국에서 외할머니가 오셨는데, 지금 서울에 계시니 먼저 인사를 드리러 가자"는 것이었다. 예비 시댁 어른 중 나이가 가장 많은 분이라 서 씨는 잔뜩 긴장한 채 남자친구를 따라 할머니를 뵈러 갔다. 그런데 할머니를 뵌 순간, 어디서 뵌 듯 낯이 익어 이렇게 얘기했다. "할머니, 처음 뵙는 것 같지가 않아요. 자주 뵙던 분 같으세요."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서 씨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시더니, 갑자기 손뼉을 치며 "아가! 나 모르겠어? 틀니, 틀니!" 하는 것이었다. 그러곤 그 옛날 탑승권을 여권 사이에서 꺼내 보이는데 거기에는 서 씨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할머니는 언젠가 비행기를 또 타면 그 때 그 친절했던 승무원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이름을 적어놓았다고 한다. 할머니는 "외손자와 결혼할 처자가 비행기를 타는 아가씨라 해서 혹시나 했는데 이런 인연이 어디 있느냐"며 좋아하셨고, 서 씨는 예비 시댁 어른들을 만나기도 전에 사랑받는 며느리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도 잘 살고 있다.

한문 속담에 積善之家 必有餘慶(적선지가 필유여경... 선을 쌓는 집안은 반드시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다)과 德不孤 必有隣(덕불고 필유린·덕을 쌓는 사람은 절대로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좋아하는 친구가 있기 마련이다)이 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소금 먹은 사람이 물을 켠다'도 같은 뜻이다. 선한 씨앗을 심으면 복된 결과가 온다는 삶의 원리를 가르치는 말이다. 우리도 기회를 얻는 대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선으로 은혜를 베풀도록 노력해야 되겠다.

/김형태 박사(한남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