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원 목사
(Photo : ) 서승원 목사

6. 요 21:15-17에서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신 이유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양을 먹이는 것”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신 이유는 베드로에게 바로 이러한 상관관계를 강조하시고 더 나아가 그로 하여금 이것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보여 진다. 다시 말해 주님에 대한 사랑과 양떼에 대한 사랑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주님에 대한 사랑은 곧 양떼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된다는 점을 깨우쳐주시고 강조하시기 위함이다. 말을 바꾸면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랑으로 나의 양떼를 사랑하라. 그리고 더 나아가 내가 내 양떼를 위해서 내 목숨을 버린 것처럼 너도 네 목숨을 나의 양떼를 위해서 버려라”는 명령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같은 요한복음 10:11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나와”라고 말씀하신 후에 다시 15절에서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연관시켜 생각하면 보다 분명해진다. 요한1서 저자가 3:16에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주님의 입장에서 보면 “내 양떼”이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형제”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만이 그 형제들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비단 베드로에게만 해당된다기보다는 목회자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구원함을 받은 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하여가 아니라 형제들을 위하여 살 의무가 있다. 특히 먼저 믿는 자들은 나중 믿는 자들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의무가 있음을 본문은 우리에게 깨우쳐주고 있는 것이다.

7. 나오는 말

위에서 “아가파오”와 “필레오”의 구별은 성경적이 아니며, 더 나아가 이러한 구별을 요 21:15-17의 해석에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본문의 메시지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오랫동안 많은 목회자들이 이런 잘못된 견해와 해석을 되풀이 해온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원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인가?

성경을 깊이 있게 그리고 학문적으로 연구하려면 히브리어와 희랍어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신학을 전공하는 사람 그 중에서도 주경신학 즉 신약과 구약을 전공하는 사람에게는 필수이다. 왜냐하면 구약이 히브리어로 그리고 신약이 희랍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동양사상을 전공한다면서 사서삼경을 원문 즉 한문으로 읽지 못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구약을 전공한다면서 히브리어를 잘 모르고 신약을 전공한다면서 희랍어를 잘 모른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구약을 전공하면서도 히브리어 성경을 잘 읽지 못하고 신약을 전공하면서도 희랍어로 성경을 잘 못 읽는 경우가 허다하다.

목회자들의 경우는 어떤가? 전공자들도 잘 알지 못하는 히브리어와 희랍어에 대한 지식을 목회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신학교에서 아무리 열심히 히브리어와 희랍어를 공부했다 하더라도 원문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 정도에 이르기는 힘들다. 드물기는 하지만 설사 그런 정도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목회를 하면서 그 실력을 유지하기는 힘들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문을 못 읽는다고 해서 원문의 정확한 뜻과 뉘앙스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길은 좋은 주석서들을 참고하는 것이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 중에 자기는 주석서 같은 것은 안 읽는다고 잘라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성경을 잘 안다는 뜻일 것이다. 실제로 깊이도 없고 그래서 도움이 안 되는 주석서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훌륭한 주석서들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평생을 성경을 연구해 온 사람들이 주석서 하나를 쓰는데 10년 이상 걸린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동일한 구절에 대한 해석이 주석서마다 다르다는 데 있다. 따라서 어떤 구절에 대해서 올바른 해석을 내리려면 적어도 3-5권 정도의 주석서를 참고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바람직하다.

물론 설교준비를 하는 데 너무 주석서에 의존하는 것도 문제이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통해서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이다. 메시지를 올바로 전하려면 설교자가 그 메시지가 담긴 본문을 올바로 이해하여야 함은 물론이다. 본문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좋은 주석서들을 참고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도하며 읽고, 읽으며 기도해야 한다. 이런 작업이 없이 주석서만 읽고 말씀을 전한다면 그것은 학문적인 깊이는 있을지 모르나 너무 딱딱할 뿐만 아니라 듣는 사람들이 은혜를 받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본문을 통해서 주께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를 바로 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주석서들을 참고하지 않을 경우 말씀을 잘못 해석하거나 너무 주관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더욱 곤란한 것은 주석서들도 읽지 않고 말씀을 묵상도 하지 않으면서 남이 한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지금까지 많은 목회자들이 요 21:15-17을 잘못 해석해온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목회자들이 설교 전에 깊이 있고 권위 있는 주석서를 한두 권만 보았더라도 그런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를 또 하나든다면 로고스와 레마의 구별이다. 요즈음 목사님들 중에 로고스는 보통 말씀이고 레마는 능력 있는 말씀이라고 말하는 것을 가끔 듣는다. 그런데 이러한 구별은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성경에 없는 이런 구별을 설교 중에 반복하는 것은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성경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다. 설교 중에 본문과 밀접한 연관이 없는 데도 굳이 히브리어나 희랍어를 말하는 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하려는 마음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 싶은 생각에서 일 것이다. 이런 부질없는 일에 신경을 쓰고 시간을 할애하는 것보다는 말씀을 묵상하고 주석서들을 읽는데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주석서들을 볼 필요가 없을 만큼 성경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고전 8: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라는 말씀을, 그리고 남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반복하는 경향이 있는 분들은 행 17:11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는 말씀을 읽고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