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가주 일원을 중심으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차세대 新개념 대안학교’를 설립해 성공리에 운영 중인 교육전문가들의 글을 연재한다. 다음은 LA사랑의교회 청소년 공립 대안고등학교 이재영 학교운영책임자의 네 번째 글이다.<편집자 주>

이재영
(Photo : ) 이재영 실장

방황기를 마치고 배움터로 돌아온 우리 청소년들. 그들의 몸의 습관이 학습모드로 바뀔 때까지 교사와 학생간 지루한 공방이 이어지곤 한다. 학생들은 온갖 기상천외한 이유를 들어 공부할 수 없는 핑게를 대고 교사들은 그들 내면에 허를 찌르는 대답으로 학생들의 시도를 무너뜨리곤 한다. 이들에겐 대부분 듣기 어려운 잔소리로 들리겠지만 다른 게 있다면 집이 아닌 학교에서 부모에게 듣던 비슷한 이야기를 담임교사로부터 듣는다는 것이다. 사랑하면 포기할 수 없다. 학생들이 정말 잘 되기 바라기에 교사들은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참으로 많다. 고등학교 졸업장으로는 담을 수 없는 삶의 가치와 인생의 길에서 맞닥뜨리는 선택에 대해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더욱이 이들의 삶에서 가치의 혼돈으로, 선택의 미숙함으로 인해 고통 받았던, 아니 그로 인해 지금까지 고통받고 있기에 마음이 더욱 애잔해지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졸업 포트폴리오: 인생을 설계하다

미술학교도 아니고 음악학교도 아닌데 졸업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는 것이 조금 우습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우리 학교를 졸업하려면 모든 12학년 학생들은 반드시 졸업 포트폴리오를 제출해 교사들로 구성된 협의회의 승인을 받아야한다. 이 포트폴리오에는 짧게는 16년, 길게는 24년 동안 살아오면서 자신이 경험하고 느끼고 공부한 것을 에세이를 통해 정리해보는 ‘기록 파트’와 졸업 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리서치와 계획을 담은 ‘인생설계도 파트’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눠져 있다. 개교 이후 초창기 졸업생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적 문제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졸업은 했지만 실제삶에 있어 다음 챕터로의 진전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역할만 따지고 보면 굳이 학교가 상관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다. 학교로부터 멀리 떨어져 생활했던 학생들을 훈련해 고등학교만 졸업시키는 일만으로도 처한 상황이 참으로 벅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될 수밖에 없는 수만 가지의 이유를 극복하고 고등학교 졸업이라는 큰 목표를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인생에 대한 설계도가 없어 예전 모습으로 귀환하려는 모습을 그저 방관하고 있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들을 좀 더 실질적으로 도와줄 수 있을까? 이들에게 필요한 건 뭘까?’ 교사들과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들이 모여 고민하기 시작했다. 작지만 실질적인 일을 도울 부분을 찾기 시작했다. 졸업생들도 만났다. 졸업 후 겪는 어려움은 무엇인지, 졸업 전에 무엇을 더 준비했으면 좋았을지에 대한 의견도 들어봤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진학이나 직장을 구하는 것이 당연한 공식처럼 느껴졌지만 사실 학생들에게 적지않은 두려움이 있음을 알게 됐다.

재학생이나 졸업생 모두에게 있는 고민은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 것인가였다. 특별한 재주나 기술도 없는데 그렇다고 뛰어난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대부분의 학생은 방향성 없이 이것저것 해보다 시간을 허비했다. 학비가 낭비될 뿐 아니라 그저 시도하는 일에 지쳐 있었다. 자기 적성을 찾는 일도 쉽지 않고 또 그 과정을 견뎌내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사실 평생에 걸쳐 알아가야 하는 일이 아니던가? 그래도 최소한의 플랫폼은 만들어줘야 했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모든 학생에게 Vocation Class 즉 직업수업을 듣도록 강제한 일이다. 이를 위해 이 수업을 전담할 교사도 새롭게 채용했다. 학생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약 1년에서 1년 6개월 동안 매주 두 차례씩 진로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함께 적성에 맞는 일들을 리서치한다.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위해 필요한 공부나 대학, 그리고 기술과 훈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스스로 찾아보게 된다.

Vocation Class는 고등학교 다음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보니 학생들의 눈빛이 사뭇 진지하다. 당장 자기에게 닥칠 일이다 보니 말이다. 이 시간을 통해 학생들은 모인 자료를 가지고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그러한 기술이나 학업을 이어갈 수 있는 학교를 찾도록 한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시간을 만들어 학생들과 같이 그 학교를 탐방하고 견학하는 시간이 있다. 캠퍼스투어는 학생들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사실 커뮤니티 칼리지 입학이나 기술학교 입학이 그렇게 어렵거나 복잡한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을 처음 밟는 학생들이나 주위에 이러한 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가정의 학생들은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커뮤니티 칼리지를 함께 방문해서, 카운슬러도 만나게 해주고 기록도 도와주고 캠퍼스투어도 해준다. 특별히 서류미비자 학생에겐 불확실한 정보들이 난무해 실제 대학에 진학이 가능함에도 방법을 몰라 포기하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 두려움은 실체를 보지 못함에서 나오는 것일 때가 많다. 실체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지만, 맞닥뜨려보지 않은 상황에서 학생들은 항상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결정을 내릴 때가 많았다.

요즈음 추세는 커뮤니티 칼리지에 진학하는 것보다 2-3년의 짧은 기간 동안 학업을 마치고 바로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Nursing school, Dental Assistance Program, Trade School, 요리사학교, 그리고 정비학교 등이 인기다. 수요도 많은데다 학비도 저렴하고 저소득층 혜택과 학비 보조프로그램도 좋아 학비 때문에 공부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 심지어 어떤 학교는 학비 전액을 졸업 후에 내도록 하는 학교도 있기 때문에 부담 없이 학업을 이어갈 수 있다.

졸업 포트폴리오에는 이렇게 자기의 꿈과 미래를 위해 진학하게 될 학교와 프로그램, 그리고 입학 신청서와 학비융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리서치하고 작성, 기록해서 만들어 놓도록 한다. 그리고 그 학교 졸업 후 관련 회사에 넣게 될 자신의 이력서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보도록 한다. 이를 통해 졸업 이수과정을 모두 마친 학생들에게는 졸업 후 다음 과정을 어떻게 이어갈지에 대한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다. 물론 실행 여부는 학생에게 달렸지만, 적어도 몰라서 못했다고는 하지 못하게 정확한 정보와 방법을 통해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것이다. 방법과 길을 알려주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연습을 반복하게 한다. 직장 모의 인터뷰도 하고 실제 상황처럼 학생들이 번갈아 질문도 던지면서 실전에서 조금이라도 자신감을 더 얻도록 말이다.

이제 이들에겐 고등학교를 꼭 졸업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더 생긴 것이다. 학생들의 변화는 이러한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일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졸업 후 자신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고 또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게 됐을 때 학생들의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미 많은 시간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더이상 안주하거나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미드나이트 미션: 배려를 배운다

동시에 우리 학교를 졸업하기 위해선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는데, 바로 구제 긍휼 사역이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몸으로 배우는 과정인 동시에 인생의 중요한 가치인 배려에 대해 학습하는 시간이다. 이를 통해 이들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내가 아닌 남을 위한 삶으로 변화되길 간절히 소망하며 시작한 과정이다. 섬김을 배우는 자체도 복된 일이지만, 자신보다 연약한 지체를 섬기면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삶에 대한 감사와 도전이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와 동역하는 선교단체 미드나이트 미션(Midnight Mission)은 LA다운타운에서 100년이 넘게 노숙자들과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재활과 자립 그리고 봉사를 해온 단체다. 지역사회의 문제를 단지 사회문제로 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나의 문제로 끌어안고 해결하기 위해 지난 100년의 세월을 오직 이 하나의 목적으로 사람들을 섬겨온 단체이다. 우리 학교의 학생들은 15명이 한 조가 되어서 매주 봉사활동에 나선다. 특별한 행사 때에만 돕는 것이 아니라 매주 평범한 일상의 삶 속에서도 이러한 섬김과 봉사를 통해 몸에 자연스럽게 남을 돕고 이해하며 배려할 줄 아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학생들이 처음엔 주로 노숙자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배식업무에만 투입됐다. 그러다 자연스레 이들과 어울려 식사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상담 아닌 상담도 해주게 되면서 아이들은 또 다른 인생의 변화를 경험하게 됐다. 늘 자신은 학교에서 그리고 집에서 상담의 대상이었지 한 번도 상담의 주체가 되어본 적이 없었던 학생들이었다. 항상 자신의 문제에 대해 말해야 했고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수동적으로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곳에선 상황이 정반대다. 노숙자 가정의 학생들(그 또래들도 있음)과 부모들의 고민을 들어줘야 한다. 특별히 이들에게 상담의 역할을 준 건 아니지만, 배식을 하면서 이들과 어울려 섬기면서 귀담아 들어주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문제의 해결은 해답을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남의 말을 들어주는 일에서부터 시작됨을 스스로 배우게 된다.

학생회: 자발적 참여를 이끌다

학생들의 변화는 교실에서도 이어진다. 사실 학생들이 학교의 주체가 되려면 자발적인 참여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교사나 스텝들을 통해서만 이끌어가기엔 역부족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학생회였다. 학교 특성상 이러한 리더십 포지션에 있어본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그런 학생들에게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시키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도록 했다. 처음 하는 일이다 보니 일을 맡기면 사실 도움이 되기보다 일을 망치는 일이 더 많았다. 도망가기 일쑤였고 하다 시간이 되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서로의 이견을 조율해 한 목소리를 내는 일은 기대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항상 미래를 보고 일을 시작하면 소망이 있지 않던가.

교사들과 서로의 다른 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의사결정을 하는지에 대해 배우며 학생회를 이끌어갔다. 학생회 조직도 인기투표가 아닌 학생들의 전인격적인 면을 보면서 그 방면에 성장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성격이 소극적인 학생도, 영어를 잘 못하는 학생도, 성격이 급한 학생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들어주고 함께 일하는 것을 배우게 됐다. 그리고 스스로 필요한 제안들을 내어놓고 학생들끼리 참여를 독려해줬다.

학생회를 통해 매달 1회 Assembly를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함께 학교를 다니지만 서로 친해질 기회가 없어 Assembly를 통해 친구들의 생일 축하도 해주고 팟럭(Pot Luck)을 하고 게임 및 그룹 퀴즈를 즐기면서 몰랐던 친구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게 됐다. 또한 ‘팬텀’ 학교 농구팀도 조직해 타학교와 리그도 갖고 응원하면서 학교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도록 했다. 또 건물 내에서 벌어지는 학생간 시시비비의 문제도 교사들이 말하기보다 스스로 규율을 만들고 학생들을 설득해 면학 분위기가 조성되도록 했다. 그리고 학교 건물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학생들이 이용하기 불편했던 편의점 대신 학교 내에 작은 Student Store를 만들어 스스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주로 간단한 음료와 라면 그리고 캔디 정도를 취급하지만 학생들 스스로 책임감을 가지고 운영하도록 했다. 리더가 되기 전엔 그저 방관자의 위치였다면 이제는 그들 스스로 학교의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제 학교 운영에서 학생회는 매우 중요한 주체다. 학생들은 교사와 행정팀들과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학교생활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더 좋은 학교를 만들기 위해 일하는 동역자들이다. 이들의 변화는 작은 참여에서 시작됐다. 그것이 모여 학교를 움직이는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변화의 시작: 삶에 대한 자세가 바뀌다

LASR 청소년 공립대안고등학교는 학생들에게 고등학교 졸업장과 동시에 삶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가능하도록 돕고 있다. 학교 교육이 차가운 학문과 지식의 습득으로 끝나지 않고 가치 있는 일에 대한 준비와 훈련이 되도록 하고 있다. 학생들은 매년 25-30명 정도가 짧게는 5-6년 길게는 9-10년 동안 지지부진했던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학교를 졸업하지만, 이들이 이 기간 동안 배우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이게 된다. 그냥 지나칠 수 있던 일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자기의 인생에 대한 자세가 달라진다.

처음 학교에 들어올 때는 어떠했던지 간에 우리에게 맡겨진 이 귀한 학생 한 명 한 명에 대한 무한책임의 의식을 가지고 이들이 학교를 떠날 때에는 단 1%라도 삶의 변화가 있도록 모든 교사가 최선을 다해 섬기고 있다. “One at a time” 한 번에 한 명씩, 학생들을 진심으로 대하며 이들이 나아가 커뮤니티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며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하게 살아갈 때 우리 사회는 더욱 밝고 진취적인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