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Photo : )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사람은 관심 있는 것에 쏙 빠지는 경향이 있다. 모든 생각이 그곳에 집중된다. 여성들은 드라마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남성들은 스포츠나 정치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텔레비전 채널을 두고 다툰다. 야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야구장을 찾고, 축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축구장을 찾는다.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은 야외 나들이를 구상하고,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은 도박장을 찾는다. 사람들은 관심 있는 것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투자한다. 관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우리 아이들을 보면 참 다르다. 혜린이는 외모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옷이나 멋을 부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형규나 세린이는 외모에 관심이 너무 많다. 멋을 부리느라 정신없다.

혜린이는 영화를 즐긴다. 그러나 아내나 나는 영화에 별로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더 큰 관심을 두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현실적인 돈 문제.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 등. 그래서 상대적으로 관심이 줄어든다.

불신자의 관심과 믿는 사람의 관심이 다르다. 불신자들은 돈 버는 것을 위해 어떤 것도 불사한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정당성을 찾을 수 없다면 돈을 잘 벌 수 있는 것도 포기한다. 불신자는 즐거움을 위해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즐거울지라도 하나님 말씀에서 어긋나면 주저하지 않고 포기한다. 만약 이 경계선이 무너지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사라진다.

어디 그 뿐이랴. 육적인 그리스도인과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관심도 다르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하찮은 것에도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상처될 수 있는 일들도 소화해 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인정받고 칭찬받는 데 관심을 집중한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다르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개의치 않는다. 남들이 칭찬해주지 않아도 주의 일을 섬기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둔다. 땅에서 상급을 받는 것보다 하늘에서 받을 상급을 더 사모한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것보다 하나님의 칭찬을 듣고 싶어한다.

고린도후서 5장 8-10절을 보면 바울이 갖고 있는 관심을 볼 수 있다. 바울은 주와 함께 있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그는 육신의 부활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죽고 사는 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죽음'을 초월해서 살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주님의 기쁨에 관심을 두고 살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며 산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 자신만 만족하면 된다. 바울은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과 달리 '자신'을 초월해서 살았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관심을 두고 살았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길이다. 그러나 이후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이 있다. 그때 하나님은 이 땅에서 육신으로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 어떤 이는 칭찬을 받지만, 어떤 이는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살았기 때문에 함부로 살 수 없었다. 늘 거룩한 두려움을 갖고 살았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그는 기대와 설렘이 있었다. 그날을 기다렸다. 왜? 바울은 '상급'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대학에서 학기말 시험을 보게 되었다. 개강을 한지 벌써 석 달이 지났다. 교수님이 강의실에 들어섰다. 학생들 모두 자신 있는 표정을 지었다. 시험 준비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자신 있다는 말이겠지. 드디어 교수님이 시험지를 나눠 주었다. 학생들은 자신 있게 문제를 풀어 나갔다. 마지막 문제를 접하게 되었다. "이게 무슨 시험 문제야?"

학생들은 깜짝 놀랐다. 도대체 무슨 문제길래? "강의실 안팎을 청소하시는 아주머니의 이름을 쓰시오." 이게 마지막 문제였다.

학생들은 고민에 빠졌다. 40대 후반의 여성. 파마머리. 그리고 작은 키. 더 이상 아는 게 없고, 더 쓸 게 없다. 결국 아무도 마지막 문제에 자신 있게 정답을 적어낸 학생은 없다. 학생들은 화가 났다. 어처구니없는 문제였기에 그럴 만도 하다.

화가 난 한 학생이 시험을 마친 후 교수님께 물었다. "마지막 문제가 점수에 큰 영향을 미칩니까?"

그러자 교수님이 대답했다. "너희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이 사랑과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지. 최소한 주변 사람들과 따스한 미소와 감사의 인사 정도는 나눠야 세상이 밝아지지 않겠니?"

바울은 사람에게 많은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말한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빌 4:1).

바울은 성도들이 좋았다. 그들이 바울의 기쁨이었다. 그들이 바울의 자랑이다. 그들이 바울의 면류관이었다. 그들만 생각하면 설레고 행복했다. 그들 때문에 웃고, 그들 때문에 울었다. 목회자인 내가 걷기를 좋아하는 그 길을 바울은 걷고 있었다.

예수님 역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가 좋아한 사람들은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다. 남녀노소가 구분되지 않았다. 건강한 자나 병든 자가 상관없었다. 부자나 가난한 자, 높은 권력을 가진 자나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사람들을 모두 좋아했다. 그들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다 쏟았다. 그들을 유익하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분주하게 사역했다.

당신은 어떤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가? 먹고 사는 문제에 여념이 없는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정신없이 살지는 않는가? 사업을 하느라, 직장을 다니느라 정신없이 분주하지 않은가? 그럼 한 번쯤 생각해 보았는가? '주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일까?'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왜 최선을 다하지 못했는가?>라는 자서전에서 고백했다. "1966년 주지사로 입후보하고 선거운동하는 3개월 동안 악수를 나눈 사람이 약 30만명이었습니다. 나를 위해서는 3개월에 30만명을 만났지만, 하나님을 위해서는 14년 동안 겨우 140가정밖에 복음을 전하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지미 카터는 사람에게 더 관심을 두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한다. 피맺힌 예수님의 유언을 증언하는 일에 더 충실하지 못한 것을 탄식한다. 그런데 지미 카터는 나를 더 부끄럽게 만든다. 그는 14년 동안 140가정을 향해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