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Photo : )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암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질병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았으련만. 그런데 불행하게도 암이 찾아왔다. 자신이 불러온 암이든, 자신의 잘못과 상관없이 생긴 암이든, 내가 암 환자라는 사실은 바꿀 수 없다.

우리 교회에도 암으로 인해 고생하는 분들이 여럿 된다. 그런데 암과 투병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각기 다르다. 어느 집사님은 심각한 형편이다. 그런데 매일 웃는다. 어떻게 하느냐고 위로하면 괜찮다고 말한다. 참으로 씩씩하고 평안해서 오히려 위로를 받을 지경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심각하지 않은 수준인데 너무너무 힘들어한다. 마음에 자신감을 잃는다. 믿음생활도 흔들린다. '저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지만 너무 낙담한다.

동일한 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너무 다르다. 같은 사건이나 환경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이 다르다. 삶의 질도 다르다.

어느 마을에 젊은 사람이 이사를 왔다. 그는 동네 노인을 찾아가서 물었다.
"어르신, 이 동네 인심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노인이 대답했다.
"그럼, 전에 살던 곳의 인심이 어떠했나요?"

젊은이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동네 사람들이 참 좋았어요.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지요."
"그래요. 우리 동네도 그럴 겁니다."

얼마 있다가 또 다른 젊은 사람이 이사를 왔다. 그도 역시 그 노인을 찾아가서 물었다.
"어르신, 이 동네 인심이 어떻습니까?"

노인은 반문했다.
"전에 살던 곳의 인심이 어떠했나요?"

그러자 젊은이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대답했다.
"말도 마세요. 정말 힘들었죠. 생각조차 하기 힘든 곳이었어요."

노인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우리 동네도 그럴 겁니다."

세상을 어떤 태도로 살아가는가?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찬 사람을 관찰해 보라. 불평거리만 있어도 그런 건 아니다. 감사할 조건도 많다. 그런데 감사할 조건은 보지도 않는다. 자신이 갖지 못한 몇 가지에 집중하면서 속상해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라. 10%는 긍정적인 사람, 80%는 중간적인 사람, 10%는 부정적인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성공하는 조직은 중간파가 긍정파의 영향을 받아 긍정적으로 변하여, '90 대 10의 법칙'이 성립된다고 한다.

반면 실패한 조직은 중간파가 부정파의 영향을 받아 조직문화가 부정적으로 변하여, '10 대 90의 법칙'이 형성된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긍정적인 파가 미치는 영향보다 부정파의 미치는 영향이 훨씬 더 강하다는 사실이다. 긍정의 전염성이 더 크면 조직은 건강해진다. 그런데 부정의 전염성이 더 강하기 때문에 조직은 부정적인 흐름으로 물들 가능성이 크다.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10:2의 비율이었다. 열 명의 사람들은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결론을 내렸다. 물론 그들은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하는 눈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현실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눈은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메뚜기와 같다고 생각했다. 메뚜기 의식을 갖고 있으니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눈을 가졌다. 그들은 긍정을 보았다. 분명히 부정적인 현실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부정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이것은 단순히 긍정적인 마인드 차원이 아니다. 그들은 긍정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긍정적인 생각과 태도를 가진 것에 불과하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면 강대한 적들일지라도 '우리의 밥, 우리의 먹이'에 불과함을 알았다.

놀라운 사실이 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이니 긍정적인 생각에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긍정적 태도를 일축해 버렸다. 10명의 부정적인 사람들의 생각을 수용했다. 그리고 이내 그들은 통곡을 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했다. 밤잠을 안 자면서 시위를 했다.

교회 안에서도 다를 바 없다. 제직회를 하면 '의장~' 하면서 손을 번쩍 들고 문제제기를 하는 성도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도 심각한 문제인 것처럼 해석한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다들 왜 이래? 우리 교회가 큰일 났어." 그런데 '다들'이라고 하는 표현이 정말 맞는가? 진짜 '큰일'일까? 소수를 다수로, 작은 것을 큰 것으로 부풀리는 유형의 사람은 아닐까? 그런 사람들의 말에 휘둘려도 괜찮은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긍정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현실을 보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바로 직시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 너머에 계신 주님의 큰 손을 바라보자는 말이다. 진리 안에 서서 믿음으로 나아간다면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심을 신뢰하자는 말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배부름과 배고픔, 풍부와 궁핍에도 대처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왜? 능력 주시는 자를 신뢰했기 때문에. 매사에 믿음의 태도를 갖는 게 중요하다. 믿음의 태도는 믿음의 삶을 낳고, 믿음의 삶은 믿음의 열매를 맺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