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그랑~' 인적이 드문 어느 날 새벽. 느닷없이 송파구에 있는 한 자전거 가게 창문이 깨졌다. 새벽에 왜 멀쩡한 창문이 깨져? 누군가가 창문을 향해 새총을 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새벽, 모자를 푹 눌러 쓴 한 남성이 자전거 가게 앞을 서성거렸다. 잠시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이내 가게 유리창에 돌멩이가 장전된 새총을 쏘았다. 그리고는 유리창이 깨진 걸 확인하고 재빨리 달아났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그 이유는 2008년으로 돌아간다. 그 당시 범인은 700만원 상당의 자전거를 훔쳤다. 훔친 자전거를 수리하기 위해 이 자전거 가게에 들렀다. 그런데 이 가게 주인이 그 자전거가 절도당한 물품임을 알았다. 그래서 몰래 신고를 했다.
덕분에 범인은 붙잡혔다. 2년 동안 교도소에서 복역을 하게 되었다. 교도소를 나온 그는 2012년 12월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신고한 주인에게 가게 유리창을 깨뜨려 왔다. 앙심을 품고. 새총을 겨냥해서. 그것도 여섯 차례씩이나.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신고 정신이 성행할 수 있을까? 그러니 반사회적인 행동을 보고서도 그냥 지나치는 시대가 되었다. 무관심이 화를 초래하지 않는 지혜라는 생각 때문에. 더불어 살아가는 밝은 사회를 이루는 데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공자는 나이 40을 불혹(不惑)이라고 했다.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이 50이면 지천명(知天命)이라 했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나이이다.
범인의 나이가 50이 다 되었다. 그렇다면 세상을 바로 살아야 할 때도 되지 않았나?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를 분별할 나이가 되지 않았나? 해야 할 행동이 무엇이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 나이가 되지 않았나?
인간의 인간됨이 무엇인가? 바로 자기성찰과 깨달음이 아닌가? 자기성찰을 하지 못한다면 그건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인간은 자기반성과 깨달음을 통해 더 나은 인생으로 성장해간다. 어떤 불행한 일이라도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반전의 기회를 만들 수 있다. 즉 불행한 일이 다행한 일로 바뀐다는 것이다.
교도소에 가서 생활하는 동안 자신이 한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교도소가 수도원이 될 수도 있었지 않나? 새로운 인생을 위한 잠시 움츠림 정도로 그치고 말았을 것을. 그런데 오히려 앙심을 품고 선량한 시민을 괴롭히다니. 복수심을 불태우면서.
망각은 신의 은총이다. 살다 보면 잊어버리고 싶은 일들이 많다. 잊어버려야 한다. 그래야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누구나 잊어버려야만 하는 일들을 갖고 있다. 그것을 잊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면, 그의 마음은 고요한 호수가 아닌 거센 해일이 몰아치는 바다로 바뀐다.
우리네 마음에 해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평안할 날이 없다. 분노가 일어난다. 앙갚음을 하고 싶은 사회적 분노가 치민다. 그래서 닥치는 사람들에게 묻지마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이미 이성을 상실한 금수나 다를 바 없다.
마음의 호수에 무엇을 던지고 있는가? 사랑과 이해와 용납의 조약돌을 던지는가? 미움과 분노와 보복의 조약돌을 던지고 있는가? 증오와 보복의 감정은 오래 묵상할 재료가 아니다. 흐르는 강물에 멀찍이 던져 버려야 한다. 다시 되찾을 생각도 하지 말고. 영원히.
보복이라? 앙갚음이라? 아무리 억울한 일로 인한 보복과 앙갚음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받은 자산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재판권을 주신 적이 없다. 누구도 심판자의 자리를 얼씬거릴 수 없다. 유일한 재판자는 하나님 뿐이다.
너무 억울한데 어떻게 해? 그래도 앙갚음을 하려 해서는 안 된다. 앙갚음이나 보복은 더 큰 화를 초래할 뿐이다. 또 다른 보복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타오르는 앙갚음의 불길은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든 후에 사그라진다. 이미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그래서 하나님은 앙갚음과 보복할 권한을 인간이 소유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당부한다. 때로는 너무 억울한 때도 있다. 도저히 속상해서 견딜 수 없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보복할 권한이 없다.
내가 나쁜 짓을 하고도 보복하고 싶은 욕구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아무 잘못도 없이 기가 막힌 일을 당했을 때야 오죽하겠는가? 당연한 인간 심리의 발동이라 생각된다. 못볼 꼴을 당했는데. 손해를 봤는데. 자존심이 짓밟혔는데.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생각만 하면 죽고 싶은 심정인데.
앙갚음하고 싶은 욕구가 분출하는 게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러나 당신이 정말 성숙한 사람이라면,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앙갚음하고 싶은 보복 심리를 십자가에 던져 버려야 하지 않을까? 이미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존재이니까.
억울한 마음이 들 때,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 마음을 토하면 된다. 하나님께서 억울한 당신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신다.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할 때가 아닌가?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선한 일도 보신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의 악한 계획도 다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악한 자를 가만 두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니까. 하나님은 신실하시니까. 하나님의 행하심을 지켜보는 게 우리가 할 일이다.
우리가 착각하는 게 있다. 보복하는 사람은 시원할 거라고. 보복 당하는 사람은 괴로울 거라고. 그러나 그렇지만도 않다. 보복하는 사람이 더 힘들 수 있다. 보복하는 사람이 더 괴로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복을 포기하는 게 행복한 인생을 사는 비결이다.
믿음이란 바로 보복할 권한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보복은 인간의 자리를 넘어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행동이다. 하나님이 하실 일은 하나님께 맡겨두고, 인간이 할 일은 그래도 용서하는 것이요, 그래도 사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