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효 목사.
(Photo : ) 장재효 목사.

룻의 영적 소망

사사시대에 유다 베들레헴 지역에 에브라다 사람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유다 혈통이고 베들레헴에서 하나님 앞에 소망의 은혜를 힘입어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나오미라는 아내와 말론과 기룐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네 식구가 꽤 부자로 하나님의 은혜 넘치는 복을 누리며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목이 곧고 강퍅하고 완악함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능멸하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려고 그 땅에 흉년이 임하게 하셨습니다. 그때는 수리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자연 그대로 내리는 비로 농사를 짓고 살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농작물이 전혀 추수할 것이 없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고를 먼저 겪어야 하는 불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레위기 26장 19-21절에 “내가 너희의 세력을 인한 교만을 꺾고 너희 하늘로 철과 같게 하며 너희 땅으로 놋과 같게 하리니 너희 수고가 헛될지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나를 거스려 내게 청종치 않을진대 내가 너희 죄대로 너희에게 칠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만하고 무례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징벌을 내리심으로 그들이 고통당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깨닫고 겸손히 무릎 꿇어 회개하면 다시 그들을 은혜조건으로 회복시키시는 역사가 이 사사시대부터 반복적으로 계속돼 왔습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계속되는 것은 그 백성들의 교만과 죄값으로 징벌을 받는 과정이었는데 나오미의 가족은 그것을 피하여 멀리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이중 진노를 받게 했던 불신앙적 배은망덕이요 하나님에 대한 대적행위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모압 땅은 사해 동편의 넓은 평원이 펼쳐진 곳으로 목축이 성행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가서 호화롭게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인 남편을 치셨고 엘리멜렉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빠른 깨달음으로 아들 둘을 데리고 서둘러 하나님의 떡집, 생명이 공급되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미련하게 그 자리에 머물면서 그곳 저주받은 혈통인 모압의 딸들과 아들을 결혼시키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집안의 두 아들마저 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으로만 대접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기대만큼 관심과 사랑을 부어주시고 분수에 넘치는 은혜로 대접을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능멸하거나 대적하거나 거역, 불순종하게 되면 하나님이 돌이킬 기회를 여러 차례 만들어 주시다가 끝내 돌이킬 가망이 없어 보이면 할 수 없이 없애 버리시는 무서운 하나님이시기도 하시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마저 죽고 과부 세 사람, 나오미와 모압여자 큰며느리 오르바와 룻이 남았습니다. 나오미는 가슴에 남편과 두 아들을 묻어야하는 불행한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냈는데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해오셨습니다. 베들레헴에 회개 역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들에게 징벌로 내리셨던 흉년을 거두시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로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풍년의 결실을 넘치도록 축복해 주셨다는 소식이 복음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을 수 있는 그 떡집을 떠난 것은 생명의 양식 공급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손길을 뿌리친 것이 되고 배은망덕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이 객사하는 불행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엘리멜렉과 나오미, 말론과 기룐 네 식구가 많은 돈을 가지고 하나님이 매질하시는 베들레헴을 떠나서 죄악 세상인 모압 땅으로 가서 잘살아 보자고 했던,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베들레헴에 남아서 하나님의 매를 맞아가면서도 애절하게 회개하고 용서를 빌었던 그 백성들의 흉년의 고통을 겪었던 것보다 나오미는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베들레헴이 회복되어서 풍년이 들었다는 복된 소식을 들었습니다. 비로소 나오미의 회개가 시작됩니다. “내가 거기에 머물러서 그들과 함께 매를 맞고 그들과 함께 고생을 겪더라도 그곳에 있었어야 했는데 어쩌자고 남편이 하자는대로 따라와서 이 저주받은 땅에 와 남편과 두 아들을 객지에 묻어야했는가…”며 이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정리하고 출발을 합니다.

나오미는 젊은 자부 둘을 함께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어 그들을 타이릅니다.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룻1:11)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시어머니의 간곡한 청을 큰며느리 오르바는 받아들이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1:16-17에서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며 강한 의지를 내보입니다.

이러한 룻의 신앙고백은 육신이 다 늙은 시어머니 그것도 남편과 두 아들을 객지에 묻어두고 여자로서는 비참한 신세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 보잘 것 없는 늙은이에게 세상조건으로 무슨 기대 걸 것이 있었겠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자기가 부담스러울 일 밖에 없었습니다. 자기가 일해서 봉양해야 하고 대접하고 음식뿐 아니라 옷도 신발도 해드려야 하는 상황이지만, 룻은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향한 영적 소망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룻은 그 집에 시집을 오자마자 남편과 시어머니로부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왜 가장이 객사하고 두 아들마저 객지에 묻어야 했는가 하는 것은 그 시어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대적하고 능멸하고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룻은 분명한 영적소망을 목적으로 다 늙은 시어머니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에 보리 추수할 즈음인 4월쯤 들어가게 됩니다. 보리 추수 중에는 남자들은 전부 다 들에 가서 움막을 치고 계속 밀 보리를 베면서 먹고 자고 합니다. 성 안에는 여자들과 아이들 밖에 없습니다. 성문에 해질녘에 들어오는 나오미를 보며 사람들은 “나오미가 아니냐?”며 묻습니다. 나오미라는 이름의 히브리어 뜻은 ‘희락’입니다. 옛날 하나님 은혜를 은혜로 알고 은혜 가운데 살 때는 기쁘고 즐거웠지만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남편의 잘못된 인도를 따라 멀리 저주받은 모압에 가서 자리를 잡게 되면서부터 하나님은 나오미의 신세를 쓰디쓴 주인공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지금은 나오미라는 이름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합니다. 이는 나오미가 깊이 참회하는 태도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치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 보장

객지에서 들어온 이 룻의 입장에서 볼 때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이라는 선민사상이 있어서 특히 이방인들 중에도 모압과 암몬에 대해서는 개, 돼지만도 못한 인간으로 취급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두 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잔뜩 먹여 딸이 아버지와 동침해서 생겨난 큰 딸의 아들이 모압이고 작은 딸의 아들이 암몬 자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주 받은 백성, 하나님 앞에 너무나 비천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아는 룻이 베들레헴에 시어머니를 따라 들어 온 것은 자기의 출신성분과 가정이 아무리 비참했다 할지라도 저주의 피를 이어받은 불행한 출신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영적 소망의 믿어지는 믿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나도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영적 소망 하나를 목적으로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로부터 엄청난 멸시와 천대, 구박을 각오하고 왔을 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룻은 그 시어머님을 위하여 광주리를 들고 자기를 멸시하는 유대인들의 틈 속에서 밤늦게 어두워서 보리이삭을 주울 수 없을 때까지 줍고 그것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 시어머니를 봉양합니다. 이러한 룻의 행동이 시어머니를 위한 행동으로 보여졌지만 그 중심은 시어머님의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인정받고 구원얻고 싶은 영적 소망을 목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다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영적 소망에 대하여 얼마나 간절함이 있는지를 살펴 진실된 마음으로 룻과 같은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룻의 이러한 효성은 온 성 안에 두루 퍼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룻의 행적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인정받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베들레헴 성주인 보아스와 결혼을 하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보장이라는 것입니다.

룻은 보아스를 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룻기 4장17~18절에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했습니다.

구약에서 다윗왕은 오실 예수님의 모형이고 예표로 소개되어져 왔습니다. 마태복음1장5절에 보면 이 룻이라고 하는 모압여인이 예수님의 족보 가운데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이것은 그 믿음이 하나님 마음에 감동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영적 소망의 믿어지는 믿음의 희생과 수고, 겸손과 섬김을 통하여 그 시어머니 나오미의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구원얻기 위한 영적 소망을 기대했기 때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