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Photo : )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있다. 임금이나 스승, 그리고 아버지의 은혜는 동일하다는 말이다. 이들은 모두 존경의 대상이요, 정성껏 받들어 섬겨야 할 존재이다. 이들은 모두 존경받을 만한 분들이다. 그렇기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게 존경할 만한 스승도 찾아보기 힘들다. 제자들을 성폭행하는 파렴치한 교사가 있는가 하면, 제자들을 폭행하는 정신병자 같은 교사도 있다.

한편 진정한 제자의 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제자도 드물다. 스승을 함부로 비하하고, 욕설을 퍼붓기도 한다. 스승에게 자기들만 아는 별명을 붙여 부르기도 한다. 더구나 폭언과 폭행을 일삼기는 제자들도 있다. 말세는 말세다.

이런 시대에 흐뭇한 어느 교사의 이야기를 나눠보자. 이 선생님은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는 직업반을 맡았다. 그가 맡은 반 학생들 가운데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아이가 있었다. 사실 직업반은 성적도 떨어지고,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학생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인문계고의 '아웃사이더'다. 하지만 그 학생은 구김살 없이 늘 해맑았다.

어느 날 갑자기 비보를 받았다. 그 학생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깜짝 놀랐다. 그 동안 홀어머니와 단둘이 살던 아이였다. 그 어머니마저 오래 전부터 암투병 중이다. 그런 몸을 이끌고 우유배달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왔다.

그런데 죽음이라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선생님은 아픈 마음으로 반 학생들과 함께 장례를 치렀다. 어쩔 수 없이 그 학생은 어머니 일을 떠맡아 생활비를 벌 수밖에 없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우유배달을 한 후에 학교에 등교하곤 했다. 고단한 나날이 이어졌다.

선생님은 천애고아가 된 그 아이가 늘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그 학생을 불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 주었다.

얼마 후, 그 학생이 스승의 날을 맞아 선생님을 찾아왔다. "선생님, 첫 월급 탔어요."

학생은 갈색 카디건을 불쑥 내밀었다. 수줍은 얼굴을 한 채.

순간, 선생님은 마음 속으로 울컥했다. "너의 예쁜 마음만 받을게. 얼마나 힘들게 번 돈인데, 선생님은 받을 수 없구나. 네가 입으렴."

선생님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그 학생이 선생님 앞에서 펑펑 울음을 쏟아냈다. 그러면서 자신의 속내까지 털어놓았다. 얼마나 고심하면서 선생님 선물을 골랐는지, 그동안 선생님께서 얼마나 큰 의지가 되었는지.

그 후로 선생님은 그 학생이 선물한 카디건을 교복처럼 늘 입고 다녔다. 그 뒤 여기저기 수소문해 장학금을 받게 된 그 아이는 무사히 졸업을 했다. 이제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다.

20년이 흐른 지금도 그 카디건은 선생님의 옷장 속에 소중히 걸려 있다. 지금은 살이 쪄 입지 못하지만, 그 옷은 선생님에겐 최고의 선물이다. 그 학생의 따스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에.

사표(師表)를 잃지 않고, 사랑으로 스승의 길을 걸어가신 선생님에게 응원의 박수를 한껏 보내고 싶다. 흔들리는 삶을 든든하게 지지해 준 선생님. 인생의 길라잡이가 되어준 선생님. 엄마와 아빠의 품을 느끼게 해 준 선생님. 그는 정말 본받을 만한 훌륭한 스승이다.

그리고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을 잊지 않고 보은의 마음을 간직한 학생에게도 감사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 선생님에 그 제자랄까?

한국의 한 여고생이 일본으로 납치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 학생은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 어느 날 길에서 만난 30대 남자가 돈을 쉽게 많이 버는 길을 가르쳐 주겠다고 유혹했다. 너무 가난하게 사는 형편인지라, 꼬임에 쉽게 넘어갔다. 결국 그녀는 일본의 유흥업소에 팔려갔다. 언니와 부모님은 정신없이 이곳저곳 수소문을 해보았다. 하지만 전혀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에 있는 동생이 언니에게 연락을 했다. 자신은 지금 유흥업소에 잡혀 있는데 여권을 빼앗겨 한국으로 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급해진 언니는 여학생의 학교 선생님에게 도움을 구했다. 제자의 행방을 알게 된 선생님은 제자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항으로 도망 나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직접 일본의 나리타공항으로 제자를 찾아갔다.

그러나 여권이 없어 바로 선생님만 출국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선생님은 곧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서 사정 이야기를 한 후 부탁을 했다. "그 아이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십시오!"

한국에 돌아온 선생님은 마침내 문제를 해결했다. 제자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많은 기자들이 취재를 하러 몰려들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신상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인터뷰나 사진촬영도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자가 상처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결국 그 자리에 있던 기자들은 발걸음을 돌렸다. 특종감을 놓쳤다는 아쉬움을 갖고서. 왜냐하면 그 선생님에게서 이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스승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제자를 위해 희생과 헌신을 아끼지 않는 진정한 스승의 마음 때문에. 이게 바로 스승 된 자가 걸어가야 할 아름다운 모델이 아닐까?

오고가는 모든 세대의 스승의 참된 모델이 되신 예수님, 그분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제물로 드리는 희생과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그분의 가르침은 곱씹고 곱씹어도 늘 새롭기만 하다.

교회 교사는 바로 그 분의 마음을 갖고 사역해야 한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스승의 마음을.

난 부모 자리를 지키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자주 갖는다. 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로서 목회를 하는 것 역시 어렵다. 때로는 짐을 벗고 싶다는 생각이 울컥 치밀어 오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부모의 자리가 그렇게 어려운가? 목회자가 왜 그렇게 힘들다는 말인가? 물론 다양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는 바로 모델로 서 있는 자신의 신분 때문이다.

말한 대로 행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도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 것을 자녀나 성도들에게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이 행한 것만 가르치고 설교할 수만은 없다. 자신이 행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죄송한 마음으로 자식이나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때도 있다. 그때 얼마나 부끄러운 마음인지. 얼마나 죄스러운지. 그래도 부모이기에, 목회자이기에 가르치고 선포해야 한다.

그렇다. 교사가 어렵고 힘든 건 바로 학생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이라는 사실이다. 이게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교사직을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 들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셨다. 부럽다. 바울 역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내가 예수님을 본받았으니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고 호소했다(고전 11:1). 이게 바로 기독교 교육이다. 이게 바로 기독교 교사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어느 날, 인도에서 한 부인이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간디를 찾아왔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선생님을 무척이나 존경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사탕을 너무 좋아해요. 사탕을 먹지 말라고 많이 얘기를 했지만, 말을 안 들어요.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아이가 선생님을 존경하니까,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이 아이가 말을 잘 들을 것 같아서요."

부인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간디가 아이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부인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부인, 2주 뒤에 아이를 데리고 다시 오시겠어요?"

2주 뒤에 오라는 간디의 이야기를 들은 부인은 "무엇인가 대단한 해결 방법을 이야기 하려는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드디어 2주가 지났다. 부인은 기대에 차서 아이를 데리고 간디를 찾아갔다. 무엇인가 거창한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간디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간디는 아이에게 조용히 말했다. "사탕은 몸에 좋지 않으니 너무 많이 먹지 말아라."

간디의 이 맥없는 말을 들은 부인은 기가 막혀서 화를 냈다. "선생님, 고작 이 말을 하려고 2주 뒤에 오라고 하신 겁니까?"

그러자 간디가 웃으면서 다정스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2주 전에는 나도 사탕을 먹고 있었거든요. 그걸 끊는 데 2주의 시간이 필요했답니다."

자신은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서 학생들에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칠 수 없다. 자신은 기도하지도 않으면서 기도해야 한다고 외칠 수 없다. 자그마한 실수에도 노발대발하면서 예수님처럼 용서하는 삶을 살자고 말해서는 안 된다. 자신은 적당히 타협하고 불법을 자행하면서,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말로서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행동으로, 삶으로 보여주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

교사는 영적인 부모이다. 가정에서 부모 노릇하기 어렵다고 아우성들이다. 그런데 교회 교사들은 자기 돈을 써가면서 고생하는 분들이다. 그저 한 영혼만 바라보면서.

그러니 얼마나 귀한 분들인가? 그렇기에 우리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고 헌신하는 선생님들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존경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들의 수고와 헌신에 대한 격려와 위로의 박수를 힘껏 쳐주어야 한다.

빈말이라도 '수고 많다'고, '감사하다'고 표현해 주면 어떨까? 아니 꽃다발이라도 하나,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전달해 주면서 격려해 주면 더 좋으리라.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