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장신대 김인수 총장
(Photo : ) 미주장신대 김인수 총장

중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라는 세 강대국 사이에 끼어 편할 날이 없었던 고난의 민족은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대전란을 겪고 난 지 한 세대가 지나고 나서 이번에는 북으로부터 또 다른 침략을 받았다. 만주 여진족의 추장 누루하치(奴兒哈赤)는 1616년 후금(後金)을 세워 그 세력을 확장하면서 중국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하더니 급기야 1636년(인조 14년) 국호를 청(淸)이라 칭하고 중원(中原)의 왕자로 군림하였다. 이들은 새 나라를 세운 여세를 몰아 그 침략의 근성을 내보이면서 조선에게 군신(君臣) 관계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청 태종은 왜란의 상처가 아물지 못한 채 국력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있던 조선에 친히 10만의 대병을 거느리고 무자비한 침공을 감행하였다.

 

경황 중에 미처 난을 피하지 못한 인조(仁祖)와 대신들은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신하였다. 성중에서는 오랑캐들과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척화파(斥和派)와 승산이 없으니 빨리 화해를 해야 한다는 주화파(主和派)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식량은 바닥이 나고 각 도의 원병은 도착하지 못했고, 강화도가 함락되어 왕자, 비빈(妃嬪)들이 포로로 잡혔다. 인조와 백관들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피난한 지 45일 만인 1637년 정월, 끝내 백기를 들어 종사에 씻을 수 없는 수치의 역사를 남기고 말았다. 지금의 서울 서쪽 송파(松坡)인 삼전도(三田渡)에서 오랜 세월 동안 오랑캐라고 천시하고 멸시하던 청 태종 앞에 종자(從者)가 되어 조공(朝貢)을 서약하는 천추의 수치스런 역사를 남기고 말았다.

청 태종은 조선 정복 후 귀로에 오르면서 소현세자(昭顯世子) 등 많은 사람들을 인질로 끌고 갔다. 1643년 청 태종이 죽고 그의 셋째 아들 세조(世祖)가 즉위하여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도 북경을 점령하여 공식적으로 청나라로 출발하였다. 이에 따라 그동안 만주 심양에서 8년 동안이나 볼모로 잡혀 있던 세자 소현 등 조선의 인질들도 북경으로 이송되었다. 이때 소현세자와 천주교회의 접촉이 이루어지게 된다.

당시 북경에는 천주교 신부들 여러 명이 사역을 하고 있었는데 소현과 친교를 맺은 신부는 북경 교구의 주교 독일인 예수회 소속 아담 샬(Adam Schall:湯若望, 1591∼1666)이었다. 그는 지금의 관상대장(觀象臺長)에 해당되는 흠천감감정(欽天監監正)이라는 직위에 있으면서 새로 건설된 청나라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마침 신부 샬의 숙소와 소현의 숙소가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므로 두 사람이 서로 접촉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전통적으로 ‘위에서 아래로’(from top to bottom)의 선교 전략을 수행하는 천주교 신부들에게 앞으로 조선의 왕이 될 세자가 관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소현 역시 볼모로 잡혀와 살벌한 만주 벌판에서 8년이라는 긴 세월을 고통스럽게 보냈고, 북경에서의 볼모 생활이 시작되는 상황에서 서양인을 처음 만났을 뿐 아니라 그들의 선진된 문명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들이 소개하는 서구의 학문과 문명은 학구적인 세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세자는 샬이 보여 주는 물건들을 호기심 있게 살펴보았다.

세자는 친절하게 접근해 오는 신부 샬과 교제를 계속하면서, 신부가 보여 주는 서양의 여러 과학서적과 천문, 지리, 역서(曆書) 등에 큰 관심을 보였다. 신부는 또한 천주교의 교리서를 전해주며 일독(一讀)을 권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세자는 서구의 여러 과학서와 더불어 천주교의 교의(敎儀)에도 자연히 접하게 되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1645년(인조 23년) 2월, 북경으로 이거한 지 두 달 만에 볼모 생활을 끝내고 본국으로 귀환하게 된다. 아담 샬은 귀국하는 세자에게 여러 가지 서양 서적과 천주교 교리서 그리고 천주상(天主像)까지 주면서 가지고 가도록 권면하였다. 그러나 세자는 다른 서양 서적은 받으면서도 교리서와 천주상은 다음과 같은 말로 정중히 거절하였다. “서양의 종교 서적과 천주상을 우리나라에 가져가고 싶은 생각이 태산 같지만, 우리나라에는 아직 천주교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혹시나 잘못하여 천주상을 더럽힐까 두려운 바입니다. 그러므로 천주상은 다시 돌려보냅니다.”

소현이 서구의 과학문명은 접수하면서 서양의 종교는 거부한 일을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라 한다. 즉 동양의 도를 고수하면서, 서양의 문명은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이를 중체서용(中體西用)이라하고 일본에서는 화혼양재(和魂洋才)라 한다.

한국은 아직 기독교 신앙을 수용하기에 여건이 성숙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샬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신앙이 돈독한 환관 5명과 궁녀 몇을 황제가 하사하는 형식으로 소현에게 딸려 보내면서 세자의 개종을 성사 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세자는 긴 볼모 생활의 고독과 어려운 귀환 길의 여독에 건강을 잃고 귀국한 지 70여일 만에 학질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세자 죽음의 원인이 중국에서 가져온 비단 때문이라는 소문이 궁내에 퍼지자 북경에서 가져온 서학 서적들과 진기한 물품들은 모두 소각되었고, 세자를 따라 중국에서 온 환관들과 궁녀들도 조선에 온 지 석 달만인 1645년(인조 23년) 7월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므로 소현세자가 볼모지에서 접했던 가톨릭도 이 땅에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고 세자의 죽음과 더불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만일 세자를 통해 가톨릭이 이 때 조선에 전해졌다면 한국 가톨릭의 역사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 북성당에서 영세를 받은 때보다도 140년은 앞당겨졌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