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근의 두 판결들

최근 미국 상하 양원 합동 연설에서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대법원이 내린 판결, “기업이 선거 광고에 돈을 쓰는 것을 제한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한 것을 언급하면서 이제 특수 이해집단의 돈이 선거판에 들어올 문을 열어준 것이라고 비판하자, 알리토 대법관은 “그것은 사실이 아닌데…”하면서 혼잣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조국 한국에서는 강기갑 의원의 공무집행방해죄 기소에 대해 법원이 무죄 판결 내린 것을 놓고 우리 법 연구회의 좌편향 판결이라고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2. 법은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 다수결의 진리입니다.

저는 이 두 사건을 보면서 어느 쪽이 옳은가 하는 개인적인 의견을 밝히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법은 객관적인 참과 거짓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과학이나 수학에서는 정답이 하나여야 합니다. 물론 요즘 과학철학에서는 같은 실험도 해석자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온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법해석에서의 진폭 보다는 물론 더 객관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법은 객관적인 해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수결로 진리를 가립니다. 대법관이 9 명이면 5대 4로 어느 쪽이 진리인지 정해집니다. 나에게는 한쪽 결론이 정말 명백해 보여도 다른 대법관에게는 반대 결론이 너무 명백하게 생각되는 것이 법입니다. 그래서 다수결 진리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정치적으로 이긴 쪽이 진리를 선포합니다. 공산당이 정권을 잡으면 지주와 자본가가 갑자기 나쁜 사람들이 됩니다. 자유 민주주의가 정권을 잡으면 공산당이 사형판결을 받습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분명한 법도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면 살인죄입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쏴죽이고, 사형 집행장에서 집행한 것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평화주의자들은 전쟁을 국가 폭력으로 규정하고 사형제도 폐지론자들은 사형을 법의 이름을 빌은 살인이라고 규탄합니다.

* 생각할 질문: “힘이 정의”라고 한 궤변론자들의 말은 정말 궤변입니다. 이에 반해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고 사약을 받고 죽은 소크라테스는 성인입니다. 법은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 다수결의 진리라는 말은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새겨들어야 할까요?

3. 법은 정치적인 타협의 산물입니다.

이런 윤리 도덕적인 죄가 아닌 경우는 더욱 더 정치적인 힘의 균형에 좌우됩니다. 간통죄를 유지하느냐 폐지하느냐, 호주제를 유지하느냐 없애느냐 하는 것 등을 보면 됩니다. 이민법도 그런 것 중의 하나입니다. 불법 체류자라도 범죄 기록이 없이 세금 납부하고 5년을 지나면 영주권을 줄 것이냐 아니면 모두 추방할 것이냐는 진리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학생 비자를 가진 사람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느냐 없느냐도 진리의 문제나 상식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누가 이기느냐에 달렸습니다. 이민국의 담당자의 유권해석에 달렸다는 말입니다.

4. 그래서 법은 개정과 폐지도 가능하고 입법과 제정이 가능합니다.

때로는 유권해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입법으로 제정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사법과 입법의 차이입니다. 사법부의 법 해석이 입법 기능까지 해야 된다는 적극적 사법론을 믿는 판사들은 확대 해석하고, 그것을 견제할 유일한 방법은 입법부에서 제한적인 법을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바마 대통령도 아마 이번 대법원 판결을 뒤집는 입법을 추진할 것이고, 한국에서도 강기갑 의원 유죄를 내릴 수 있는 입법을 추진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민국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수민족들이 단합해서 법을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있는 법은 존중해야 되지만, 해석이 다를 수도 있고, 법은 개정과 입법이 가능하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흑인 차별 법을 개정해서 투표권을 주고, 여성 차별법을 개정해서 참정권을 준 것입니다. 이처럼 개정과 제정이 가능한 입법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들이 물어야 될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법이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맞는 법인가?”

5. 법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이민자나 유학생 등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살리는 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현실의 법이 그것을 잘 실천할 수 있도록 의원들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되도록 선거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법이 뒷받침하지 않을 때는 법을 고치는 신앙적인 운동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역사는 그렇게 발전해 왔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체포되었고 안중근 의사는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들을 존경합니다.

유죄인가 무죄인가, 법을 잘 지켰는가 지키지 않았는가가 정말 중요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법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법인가를 묻는 것도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둘의 긴장 관계 속에서 늘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럼이 없는 사람들이 되려는 사람들입니다.

6.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겸손이 서로를 존중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법원 판결문은 다수결로 결판이 나지만 소수 의견이라는 것을 꼭 붙입니다. 훗날에는 소수 의견이 판례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인간의 법을 집행할 때는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내 해석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수결에 승복하면서도 자긍심을 잃지 않고, 다수결로 이겼으면서도 승자의 교만을 갖지 않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는 것이 가장 귀한 마음입니다. 오늘 내가 어떤 입장에 서 있든지, 내 법해석이 어떠하든지, 다른 사람 해석도 존중하는 마음이 있다면 신앙인이고, 다른 사람은 다 잘못되었다는 마음만 있다면 회개할 일입니다. 우리는 다 완전하지 않은 가운데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은 동안만 힘이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람들 다 떠나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섰을 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실지만 문제입니다. 겸손과 사랑을 잃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