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내 그늘에 앉아 노래만 부르던 베짱이가 개미의 집을 찾아온다. 그러나 개미는 음식을 나눠주지 않는다. 춥고 배고픈 베짱이는 그 겨울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당연한 문제에 혼란스러워 한 어린이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당연한 답이 없어졌다. 아니 정답이 변했다.

비행기를 만들어서 파는 것이나 노래 한곡을 잘 만들어 저작권료를 받는 것이나 똑같은 이익을 남기는 세상이 되었다. 노래하는 베짱이들이 노동을 하는 개미들보다 몇 십 배, 몇 백배 화려하고 부유하게 살기도 한다. 개미는 평가절하 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이 개미의 탓은 아니다. 그는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으니 그에게 벌을 내릴 순 없다. 다만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세상의 변화에 눈을 감았던 잘못이 있어 스스로 도태되고 있는 중이다.

이는 조직형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과 정보형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개미는 협동심, 조직성, 근면성의 상징이다. 지구에 등장한 생물체 중에서 개미처럼 단단한 조직을 이루며 유구한 세월을 사는 생물이 많지 않다고 한다. 개미는 근대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유럽인들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지향했던 서구적 가치관의 정점을 보인다.

그간 개미 이미지가 긍정적이었던 것은 그것이 산업사회의 가치관에 걸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참으로 의외의 결과가 나온다. 부지런히 움직이며 일하는 개미에 번호를 붙여 촬영해 보면 100마리 가운데 실제로 열심히 일하는 개미는 15마리에 불과하다는 조사가 있다. 85마리는 일을 하지 않고 허둥대거나, 괜히 남의 뒤를 따라다니거나, 또는 일하는 걸 지켜보는 일을 한다. 다시 그들 중 일하는 15마리를 모아 번호를 붙여 두면 역시 그 중에서 15%만이 일한다. 무릇 땅에 근거해 만들어진 조직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잘잘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조직이라는 것은 만들어지는 순간 그렇게 된다는 얘기다. 조직의 생리상 일하는 자와 조직에 얹혀사는 자가 있게 마련인 근대 관료 조직의 특성이 그렇다.

그럼 거미는 어떨까? 땅에 구멍을 파고 사는 개미와 달리 거미는 허공에 그물을 치고 산다. 그러다 먹이가 걸리면 기습 공격을 해 먹이를 낚아챈다. 거미 세계는 관료 사회처럼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다. 정보를 먹고 사는 네트워크 사회다. 개미가 관료 마인드를 갖고 산다면, 거미는 정보화 마인드를 갖고 산다. 역사가 증명하듯 거미의 마인드와 동작들은 개미로서는 납득도 예측도 되지 않는 것이다. 개미의 마인드를 갖고 있던 중세의 유럽에서, 거미의 마인드를 지닌 칭기즈 칸의 몽골 유목민들은 어떤 방식으로도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기준이다. 어떤 사람이 직장에 들어간 이후 '평생 해고당하지' 않고 3, 40년 근속을 한다면 그는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자. 만일 그가 타이어 완성 반에서 근무했다고 치자, 그럴 리는 없겠지만 다른 부서로 이동이 없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의 인생은 무엇일까? 타이어가 몇 개 생산되었는지 숫자만 세다가 평생을 보낸 것인가? 그가 속한 조직은 완성체일지 모르지만, 그 속의 개개인은 부속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 처음이자 끝인 완성체가 바로 인간이다. 위성안테나와 같은 정보망을 펼쳐놓고 세상을 노려보고 있는 거미의 마인드를 배워야 한다. 조직형 인간이 아니라 정보형 인간이 각광을 받는 시대이다. 시대를 읽는 눈이 필요하다. 안목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