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너그램’(anagram)은 철자를 뒤죽박죽 섞어놓고 원래 단어나 문장을 알아맞히는 일종의 글자 퍼즐 게임이다. 라틴어가 어원으로 ‘위대한 예술’이란 뜻이다. 미국에선 상상력과 분석력을 키워주고 지능을 계발해 준다고 해서 어렸을 적부터 애너그램을 가르친다.

예를 들어 ‘OWLS’의 애너그램은 ‘SLOW’다. 우스개지만 캘리포니아(California)의 애너그램은 정답이 ‘아프리카 사자’(Africa lion)가 된다.미국에서 팔리고 있는 현대의 ‘엘란트라’(Elantra)도 알고 보면 애너그램이다. 알파벳을 재배열하다 보면 ‘렌털’(Arental)이 되기 때문이다. 렌터카 시장에 처음 보급돼 지금은 저가 소형차 시장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는 차종이다.

현대뿐이 아니다. 일본차인 ‘수바루’(Subaru)는 애너그램으로 ‘U R a bus’, 곧 ‘당신은 버스’라는 뜻이다. 내부 면적이 경쟁차종에 비해 크다는 것을 암시해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어낸 것이다.

자동차 시장에서 애너그램을 마케팅 기법으로 채택해 대박을 터뜨린 기업은 뭐니 뭐니 해도 일본의 도요타가 꼽힌다. 세계적인 명차 ‘캠리’(Camry)는 애너그램으로 ‘마이카’(My car)다. 처음부터 애너그램을 염두에 두고 이름을 지었다고 하니 도요타의브랜딩 실력은 알아줄만 하다.

그러고 보니 도요타는 알파벳 C로 시작하는 차가 유난히 많다. 코로나, 코롤라, 캠리…. 도요타의 'C 법칙'에 깔려 있는 주제는 정상의 지위를 상징하는 ‘왕관’이다. 코로나는 스페인어, 코롤라는 라틴말로 각각 ‘작은 왕관’을 뜻한다. 캠리도 일본말의 ‘칸무리’ 곧 관(crown)이란 의미다. 미국시장을 겨냥한 차여서 발음하기 쉽게 ‘캠리’로 표기한 것이다.

‘마이카’와 ‘왕관’ 그리고 무결함의 성능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캠리는 미국의 자동차 시장을 평정하다시피 했다. 캠리를 ‘마이카’ 로 소유하고 있지 않은 가정이 드물 정도다.

브랜드 인지도가 코카콜라에 버금간다는 말이 나올 만큼 지난 수십 년 동안 절대적인 우위를 지켜온 캠리. 도요타는 이 덕분에 GM과 포드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자동차 제국을 일궈낼 수 있었다. 창업 80년 만에 비로소 ‘왕관’을 쓰게 됐다고 할까.

그런데도 캠리가 공략에 실패한 곳이 한군데 있다. 웬일인지 유럽에선 극히 부진해 몇 해 전 판매를 중단해야 하는 굴욕을 당했다. 아마 그 곳엔 아직도 최고통치자가 왕이나 여왕들이 많아 캠리의 ‘왕관’이 통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미국시장에선 그러나 영원토록 ‘마이카’로 군림할 것만 같았던 캠리가 요즘 휘청대고 있다. 가속페달의 치명적인 결함을 해결하기 전까지 판매는 물론 생산도 중단한다는 것이다. 이 조치엔 캠리 뿐 아니라 코롤라 등 도요타의 8개 인기 모델도 포함돼 있다. 리콜 조치도 함께 취해져 북미에서만 1,000만 대가 넘는다.

도요타 역사에서 생산과 판매를 동시에 중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세계자동차 시장에 대혼란이 일어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동안 신뢰와 품질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도요타의 이미지가 한순간에 곤두박질치게 된 것이다.

어쩌면 도요타는 이번 사태로 인해 ‘왕관’을 벗고 ‘양위’를 해야 할 위기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현대가 ‘왕위’를 계승하게 될지, 아니면 미국의 GM과 포드가 옛 영광을 재현하겠다며 다시 시동을 걸지, 요즘 자동차 업계는 새판 짜기에 분주한 듯 보인다.국가나 기업이나 부단한 자기 혁신의 노력이 없는 한 ‘제국은 영원하지 않는다’는 경구를 도요타가 새삼 일깨워 주는 듯하다.

박현일 기자, uko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