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한국서는 ‘목회자의 날’ 기념대성회가 열렸다. 한국교회정보센터가 1996년 처음 제정한 목회자의 날은 경찰의 날, 국군의 날, 학생의 날은 있으나 10만여 명에 이르는 목회자를 위한 날은 없다는 교계의 목소리를 반영해 시작됐다. 올해는 교파를 초월해 4천여 목회자가 수원 흰돌산기도원에 모였고 포항 석병교회 이훈 목사가 목회자를 대표하는 ‘선한목자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마침 집회차 LA를 찾은 이 목사를 만났다.

이 목사는 지난 82년 서울 영락교회 전임전도사로 목회 일선에 발을 디뎠다. 그는 부모가 늘 오갈 데 없는 주위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와 섬기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그 영향으로 자연스레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고, 그는 영락교회를 섬긴 지 5년 후 S교회로부터 담임목회자 청빙을 받았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당시 노부모와 오갈 데 없는 이들까지 해서 9명의 식구가 딸려 있었지요. S교회는 식구가 너무 많으니 사모와 아이 둘만 데리고 이사오라는 겁니다. 거동도 제대로 못하는 분들은 어떻게 합니까?”

생각할 것도 없이 교회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그날 S교회 안마당에서 하염없이 울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양로원 사역을 하고 싶다”고 기도를 드렸다. 이 목사는 그후 포항시 구룡포읍 석병리에 위치한 석병교회로 부임했다. 양로원 사역을 하리라는 마음으로 최소 10년 작정하고 떠난 길이었다. 그렇게 부임한 그는 부임 1년 후 교인들을 간신히 설득해 교회 옆에 28평짜리 개인주택을 지은 뒤 노인 두 분을 모시고 양로원을 시작했다.

“치매 할머니 한 분이 계셨어요. 한번은 욕실에 들어가는 할머니를 뒤따라 가보니 양변기에 얼굴을 박고 세수를 하고 계셨어요. 그 할머니가 세수 대야에 대변을 누고 타일 벽에다 똥을 다 발랐어요. 참을 수 없어서 ‘할머니 앞으로 똥칠 한번만 더 하면 쫓아버릴 줄 알아요’라고 소리쳤지요. 그러나 다음날 할머니를 찾아가 용서를 빌었어요. ‘할머니 똥칠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그렇게 점차 인근에 소문이 나면서 노인수가 늘어 기존 주택 하나로는 좁아 더 이상 모실 수 없었다. 그때 마침 이농현상으로 인근 석병초등학교가 폐교되면서 경매에 나왔고 기도한 끝에 폐교가 된 학교를 임대해 시설을 개조했다. 교회 역시 양로원 옆에 조립식 건물을 세우고 이전했고, 교인들은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100여 명의 입주 노인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점차 한국교회 중에서도 노인복지로 성공한 농촌교회의 모형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 목사는 그러다 노인들이 변비로 심하게 고생한다는 걸 알게 된다. 일주일에 한번 꼴로 어렵게 변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변비약과 좋다는 음식을 먹였지만 오히려 속이 불편해하는 것을 보고 나서는 직접 손으로 관장[灌腸]을 하게 된다. “변비 때문에 고생하는 노인들을 위해 손수 항문에 손을 넣어 시원하다고 할 때까지 일일이 다 파냅니다. 노인들이 너무 좋아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보내신 이들이라고 생각하니 당연히 즐거운 마음으로 하게 되죠.”

LA풍성한교회 박효우 목사와의 인연도 남다르다. 이 목사는 지난 3년 이상을 본 교회와 양로원 사역을 후임에게 물려주고 캐나다 원주민선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작년 원주민교회 개척자금을 놓고 LA를 찾게 되었고 지인의 소개로 박 목사를 만나게 된다. 그 자리에서 박 목사는 이 목사를 위해 기도하면서 “조만간 본 교회로 다시 청빙을 받아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음성을 듣게 된다. 그리고 실제 얼마 뒤 이 목사는 포항 석병교회로 다시 청빙을 받아 양로원 사역을 현재까지 이어가고 있다. 150호의 작은 어촌마을에서 교회가 예전의 200명 규모로 다시 성장세를 보이는 것도 간증꺼리다.

이훈 목사의 남다른 양로원 사역과 간증은 26일(수) 성림장로교회(담임 원영호 목사)와 30일(주일) 세리토스동양선교교회(석태운 목사)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