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귀중품 또는 상품을 구입할 때 많이 고려하는 것이 ‘순도’에 대한 것입니다. 당연히 가격은 순도가 높을수록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금을 구입할 때 순도 몇 퍼센트가 되느냐에 따라 가격이 결정됩니다. 과일 쥬스 같은 것도 순도 100%라고 할 때 그 가격이 가장 높습니다. 순도가 높다는 말은 불순물, 또는 첨가물의 퍼센테이지가 낮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순도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진짜’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순도가 높은 상품을 찾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순도가 높은 신앙인’을 찾으시는 것이 아닐까요?

창세기 18:26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소돔성에서 의인을 찾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성 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그러나 소돔성에는 45인도 없었고, 40인도, 30인도, 20인도 그리고 단 10인도 의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돔성이 멸망을 당했습니다. 소돔성에서의 의인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도가 높은 신앙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한계시록 3:2을 보면 주님께서는 사데교회에서 의로운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다.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나 사데교회는 말씀과 성령으로 변화 받아 흰옷 입은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습니다. 행위 온전한 것이란 바로 ‘순도 높은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처럼 신약시대에도 주님께서는 ‘순도가 높은 신앙인’을 찾고 계십니다. 그 순도높은 신앙이 바로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감당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압니다. 이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처음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좋은 동기로, 좋은 생각으로 신앙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우리의 마음은 흐트러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좀더 드러나고, 내가 좀더 인정받기 위하여… 사람들을 의식하는 신앙으로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그 변질을 막으려 해도 쉽지 않습니다. 또한 나이가 들어가면서 인생의 경륜이 쌓이면서 순수성은 파괴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 중 하나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임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은혜에 관한 개념까지도 우리 자의대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목사님, 요즘에는 언제든지 성경을 읽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직장에서도 마음대로 볼 수 있지요. 정말 은혜입니다” 평소 승부욕이 좀 강하고 그래서 매번 교회성경읽기의 선두그룹에 드는 한 교우의 말이었습니다. “아니, 회사가 그걸 허락하나요? 사장님이 독실한 크리스천인가 보군요?” “그건 아니고요. 요즘에는 책상마다 컴퓨터가 있잖아요. 그래서 성경 프로그램을 열어놓고 그냥 읽는 것이지요. 누가 아나요. 열심히 일하는 줄 알겠지요. 뭐” 교우의 그 말에 깜짝 놀란 목사님이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회사에서의 시간은 내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시간은 빼앗지 않으시는 회사의 시간입니다” 제멋대로, 자기 편리한 대로 되면 은혜라고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것도 특별히 신앙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나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일이라면 불법도 은혜로 여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성도야 말로 은혜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좋은 대로 은혜의 의미를 해석하고 은혜를 자신의 편리를 위해 도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도의 전체 분위기는 어째 순수하지 못한 것 같지 않습니까?

신앙의 순수성은 또한 내가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임을 인정할 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형편없는 다 망한 구제불능의 대상이라고 여겨지면 우리 얼마나 기분 나빠합니까? 자존심 상한다고 시험들었다고 얼마나 난리를 피웁니까? 교회 안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얼마나 화가 납니까? 내가 조금 무시당했다고 생각이 들면 원통해서 어쩔줄 모르는 것이 우리들 아닙니까? 우리가 아쉬울 때 긍휼히 여겨달라고 하지, 사실 내가 긍휼의 대상이라 하면 정말 기분 나쁩니다. 요즘은 구제헌금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구제 헌금한 것을 전달해 드리면 오히려 시험 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구제의 대상이라는 사실 앞에 자격지심, 또는 상실감이 생겨서 상처를 만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못살기로는 세계 최대 빈민국인 북한도 ‘구제’ 또는 ‘구호’라는 말에 극단적인 알러지 반응을 보입니다. 제가 북한에 들어가서 협상을 하는데 구호품이라는 말에 북한 관료들이 화를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막상 도움이 필요한 처지가 되었어도, 자신이 도움을 받아야 할 구제의 대상이라는 말 앞에서는 기분 나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긍휼의 대상임을…

순도가 떨어지는 삶을 경계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가만히 놔두면 순도가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하나님 은혜와 긍휼의 대상이 되었음을, 그러므로 높은 순도를 유지하도록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의지를 동원해야 합니다. 말씀훈련의 자리에, 예배의 자리에, 기도의 자리에, 섬김과 봉사의 자리에, 그리고 찬양의 자리에 서는 것을 좋아해야 합니다. 이 열심을 잃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