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에 대한 국민과 타종교인의 공격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는 혹시 중세말의 교회를 향한 공격과 같은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기만 하다. 그 당시, 교회의 탑은 높게 올라가고 있었지만, 교회의 윤리는 바닥을 쳤다. 교세는 매우 강한 듯 했지만, 교회로부터 이탈되는 민심을 수습하기에 교회는 자기정화의 능력을 상실한 듯 했다.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려는 노력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졌다. 종교개혁자들은 지상에 존재하는 “조직된 교회”가 모두 “진정한 교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소위 표면상으로 “보이는 교회”(visible church)와 진정한 교회인 “보이지 않는 교회”(invisible church)가 다르다고 말한 것이다. 이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교회, 성경적인 성례전을 부르짖으면서, 거짓교회와 거짓성례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중세교회를 개혁하려는 이들의 노력은 처음에는 구체제 안에서 시작되었지만, 공고한 기존의 교회가 이들을 인정하지 않자, 많은 교회와 영주가 중세교회를 떠나면서 개신교가 생겼다.

그러나 구교 안에서도 개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교회를 잃고 나서, 개혁자 죤 캘빈(John Calvin)이 다니던 몽테규 대학과 파리의 소르본느를 다닌 스페인의 지도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가 구교 내에서 개혁의 횃불을 다시 들었다. 그는 바르셀로나 근처의 만레사에서 수련을 하면서 “영적 훈련”(Spiritual Exercise)이라는 소책자를 쓰고 이를 통하여 제자들을 길렀다. 수차례의 투옥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결국 로마의 권위는 그를 인정하여 “가난, 순결, 그리고 순종”을 모토로 하는 “예수회”가 시작된다. 이 예수회는 개신교에 의하여 잃어버린 수많은 나라와 신자들을 상당수 되찾고, 선교를 통하여 동양과 중남미 교회를 개척한다.

예수님은 완전하시나, 지상의 교회는 아직도 죄와 사망의 권세와 싸우고 있는 “전투적인 교회”이다. 교회 안에는 내적, 외적으로 항상 개혁되어야 할 부분이 존재한다. 지속적인 개혁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언젠가 교회가 혁명적인 변혁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공적 현장에서 매도의 대상이 되는 신음하는 한국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 이민 교회도 개혁에 관한 면죄부를 받을 만큼 온전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개혁하여야 하나? 종교개혁의 시대에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분리가 문제가 되었다면, 지금 이 시대에는 “믿음”과 “행함”의 분리, “신자”와 “제자”의 분리가 문제이다. 더욱이 “복음전도”(evangelism)와 “사회봉사”(social service)의 분리, “말을 통한 설득”(persuasion)과 “선행을 통한 임재”(presence)의 분리, 그리고 “교회성장”(church growth)과 “선한 행실의 증거”(witness) 사이의 분리가 문제가 되고 있다. 더구나 웃자란 교회의 사회적 교양의 결여는 사회와 타종교에 대하여 종종 무책임하거나 무례함, 표면상의 전도는 하고 있으면서도 존경을 받지 못하는 신앙인상(像)을 양산해 내었다.

이 같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신자가 모두 남김없이 제자가 되는 일이다. 교인과 제자의 분리를 바로 잡는 것이 시대의 목표이다. 교회의 약점 중의 하나는 교회의 숫자적 확장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제자 됨이 상실된 것이다. 많은 교인 중에 훈련받은 제자(disciplined disciples)가 적다는 것이 문제이다. 교회 출석은 신앙생활의 시작이지 전부가 아니다. 신앙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과 관련된 것이라면, 주일 수 시간 예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성도의 의무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도의 삶을 “고급의 사교생활”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 됨은 프로그램이 아니다. 제자훈련은 1, 2년 공부하고 좋은 강의 듣고 숙제하고 마쳐지는 것이 아니다.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됐다고 제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아니 어떤 사람은 프로그램으로서 제자훈련을 받지 않았더라도, 이미 제자의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 프로그램은 다만 제자 됨을 돕고 지원하려는 것이다. 성경에서 제자란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신자를 일컫는 명칭의 하나였다.

얼마 전에는 후배 목사가 “제자목사 되는 운동”을 시작하겠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얼마나 신자들이 신자답지 않고, 얼마나 목사가 목사답지 않았으면 제자라는 이름으로 운동을 시작했을까 마음이 무거웠다. 지금은 목사도 너무 부실하여 제자라는 말을 새롭게 써야 된다니, 아무래도 우리가 사는 이 시대 기독교의 목표는 “값싼 기독교의 퇴치”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