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동업자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같은 직종에 종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다른 의미의 동역자라는 말이 있다. 풍기는 뉘앙스는 어떤 공통적인 사명감을 갖고 같이 일한다는 뜻이 강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교계에서 목회자들이 ‘우리는 같은 동역자’라는 말을 자주 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목회자에게 한정하지 않고 넓은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을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 해석에 따른다. 문제는 동역자간의 인간 관계다. 동역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절대적이면서 인간관계도 원만해 주위의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참된 동역자들이 많다. 그래서 세상은 살만하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사명감도 결여되고 옆에 있는 동역자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언제나 부정적인 말을 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예상 외로 많다는 얘기다. 하기는 농부가 좋은 씨를 밭에 뿌렸는데 생각지 않은 가라지가 무성하게 자라듯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세상이다.

갈등은 목회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LA의 ‘S’ 교회의 김 집사는 전도 주간에 가까운 동창 친구 이씨를 교회로 인도했다. 김 집사는 친구를 데리고 각종 집회는 물론 새벽 예배까지 인도하며 좋은 음식을 자주 대접 하면서 새 교회에 정착하도록 헌신했다. 약 6개월이 지난 어느날 새벽 기도회에서 이 씨가 방언을 하며 눈물 콧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새로운 신비의 체험을 했다. 이후 그는 남편과 시부모, 시동생의 가족까지 교회로 인도했다. 헌금도 했다. 한 명이 귀한 이 개척 교회는 이씨의 가세로 일개 사단을 얻은 것 만큼 활기가 충천했다. 목사로부터 전 교인이 이 씨를 천사처럼 대접했다.

이때 문제가 생겼다. 이 씨를 전도 한 김 집사가 상처를 받았다. 자기가 인도하고 헌신해서 그만큼 자랐는데 자기에게 수고 했다는 말은 없고 새 교인 이 씨만 대접 받는데 자기는 자꾸 작아 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질투, 시기심도 생겼다. 김 집사는 이 씨의 옛날의 숨겨져 있는 약점을 살살 흘렸다. 한국에서 부도 내고 도망 왔고, 많은 사람들의 돈을 떼 먹고 숨어 살고 있고, 남편은 바람둥이다 등등- 그 소문은 금방 퍼져서 이 씨는 그 교회에 더 있을 수가 없어 그녀와 온 친척은 다른 교회로 옮겼다. 이 교회는 큰 시험을 만났다. 그 책임 소재를 따지게 되었고 그 후유증은 오래 갔다.

여기에서 동역자간의 갈등의 원인을 찾아본다. 앞에서 보듯 김 집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한다고 맹서했고 또 그렇게 헌신의 열매가 맺혀졌는데 왜 실망하고 쌓아 올린 탑을 스스로 헐어 버렸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주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예수님 보다 더 앞에 있기 때문이다. 내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장사 지내지 않으면 동역자간의 갈등은 영원히 계속 될 것이다.

성경을 보면 모범적인 동역자 관계를 여호수아와 갈렙에서 찾는다. 둘은 같은 모세의 후계자들인데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 선출 되었다. 그런데 갈렙은 시기 하거나 질투 하지 않고 그의 생을 다 할 때까지 여호수아를 전적으로 도와서 가나안의 7족속을 몰아 내고 새 나라 건설에 일등 공신이 된다. 여호수아도 갈렙을 정적으로 보지 않고 끝 까지 우정을 지키며 그를 보호한다.

또 한 사례는 신약에서 바나바와 바울 관계를 본다. 바울이 큰 인물이 되기까지는 바나바의 절대적인 보살핌이 있었다. 교회를 핍박하고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앞장서고 다메섹의 교인들을 체포하러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 새 사람이 된 바울은 광야로 가서 몇 년 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믿어 주지 아니했다. 그 때 숨어 있는 그를 찾아간 사람이 바나바이다. 바울을 불러내어 자기가 섬기는 안디옥 교회로 인도해서 몇 년간 훈련을 시켰다. 때로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을 찾아가 바울에 대한 새로운 면을 보여 주면서 같은 동역자로 일 할 수 있도록 협조를 구해서 전도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제 2차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될 때 마가를 제외 시키자는 바울의 의견이 강경했다. 제 1차 전도 여행 때 도중 하차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나바는 젊은이에게 기회를 또 주어서 교육 시키자는 주장이다. 결국은 합의를 못 보고 서로 다른 길로 떠난다.

또 있다. 어느날 저녁에 예수님의 수 제자인 베드로와 바나바, 그리고 다른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하는 곳에 바울이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율법에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를 못하게 되어 있었지만 예수님이 오시면서 그 장벽이 무너져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전통이 쉽게 깨지지 않아서인지 모르나 베드로나 바나바는 식사에 동참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을 했다. 그 때 바울은 신앙의 대선배들에게 위선적인 행동이라고 큰 소리로 책망을 했다고 바울 자신이 성경에 기록 하고 있다. 그때 심한 책망을 들은 바나바의 기분을 생각해 보자. 언제 그렇게 컸다고 나에게 이렇게 대 할까 하고 섭섭해 하지 않았을까?

또한 갈등의 소재는 다른 면에 또 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의 이름의 순서가 바뀐다. 초장에는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하다가 얼마 후에는 그 순서가 일정하지 않다가 후에는 바울과 바나바로 굳어진다. 나중에는 바나바의 이름을 찾지 못한다. 그 때 바나바의 심정은 어땠을까?

후배 바울의 인기는 상승하고 큰 일들을 하는데 자기는 점점 작아지고 쇠퇴한다고 생각 했을 때 얼마나 외로웠을까? 여기에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펀치를 날려 그를 죽이는 방법, 아니면 내가 죽는 길이다. 그 것도 아니면 제 삼의 길로 서로 양보하며 윈윈의 방법이다. 바나바는 두 번째 길을 선택했다. 그는 끝까지 바울을 밀어주어 큰 일을 하도록 백방으로 돕고 본인은 한 알의 밀알로 땅 속에 깊이 묻혀서 썩어 한 줌의 거름이 되어 초대교회의 산 순교자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