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선교사를 받는 나라에서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로 변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구의 개신교 선교사들을 받아들일 때, 우리 민족은 “만물의 찌끼”와 다름이 없었다. 대체로 서구의 제국주의와 기독교 선교는 같은 배를 타고 왔으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아주 달랐다. 기독교는 일본 제국주의 아래 있는 우리에게 개화와 독립을 위한 기독교였고, 기독교는 민족의 신음에 깊이 동참하여 거의 모든 민족 지도자들은 기독교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의 개신교가 현재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도 기독교가 이러한 민족의 소망에 깊이 부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베트남, 이라크 및 아프카니스탄과 같이 기독교 선교가 심각한 위협에 처한 나라들의 역사를 살펴볼 때, 그 대부분의 나라는 기독교를 전한 나라에 의하여 받은 어김없는 깊은 상처가 있다는 사실이다. 선교사의 죽음 혹은 활동의 제한을 당하는 저변에는 그 나라를 일방적으로 매도만 할 수 없는 이유가 존재한다. 선교대국이 된 우리가 이제 기억하여야 할 것은 기독교를 전파하는 나라가 자신의 나라가 범죄를 저지른 역사적 기록을 연구하지 않은 채로 선교의 열정만을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놀랍게도 최근 우리나라의 선교사들이 나아가서 순교를 당한 사건은 적어도 우리 군대가 들어간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에서 생겨났다.

올해 2008년 초, 중국에 의하여 강점당한 아픔을 가진 티벳의 저항을 보면서 고민하게 된 점은 과연 선교사는 민족의 요구에 어떻게 부응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선교사가 중국의 편인가, 아니면 티벳의 편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심히 복잡한 문제이다. 티벳 민족의 편에 선다는 것은 “불교의 지배를 용납한다”는 것이 아닐 수 없고, 중국정부의 편에 선다는 것은 우리가 선교할 티벳 민족의 정서를 해치는 제국주의를 향한 편승이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 왔던 서구 선교사들의 입장은 곧 지금 선교사를 비서구 지역에 보내는 우리의 입장에 대하여 통찰력을 준다. 1919년 한국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미국선교사들은 “철저히 정치적 중립을 취하고 조선 측의 운동에 가담하여 손해를 당하는 것은 미국 정부가 책임질 수 없다”는 훈령을 받았다. 미국의 입장이 외세의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우리 민족주의자들에게는 한없이 서글픈 정책이었겠으나, 그 점은 한 세기가 지난 우리 선교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첫째로 선교사는 선교지에 민족주의 운동을 지도하기 위하여 나아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선교사는 현지 민족의 독립을 돕는 이 시대의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아니다. 선교사가 펼치는 하늘나라 운동은 직접적으로 민족운동에 참여하는 정치운동과는 차이가 있다.

둘째로 선교사는 민족독립운동이 아니라도 민족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많은 사역을 구상할 수 있다. 지난 세기 미국의 선교사들은 한국에 와서 복음과 함께 의료와 교육에 많은 투자를 했다. 민족의 장기적인 개화와 번영을 돕기 위하여 후대를 교육하고 아픔을 치유하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간접선교의 방법이다.

셋째로 선교지의 현지인 지도자를 통하여 자민족을 변화시키는 구령사업과 선교를 하도록 가르치는 정책은 매우 높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선교하는 나라의 선교사에게 종속된 현지의 기독교 지도자가 아니라, 자립과 자치의 능력을 가지고 스스로 전하는 민족교회만이 견고할 수 있다. 자주적인 민족교회의 성립과 성숙은 미래를 위한 필수적인 일이다.

넷째로 우리는 선교를 통하여 그 민족의 발전을 이끌어 나아갈 미래 지도자들을 길러야 한다. 예수님이나 바울이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보수적 입장을 선택하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의 성역을 흘러 넘쳐 로마의 지도자들을 사로잡아 기독교의 전파가 교회적 운동에서 역사적 운동이 되게 하였다.

하늘나라의 복음은 그 민족을 가장 좋은 것으로 채울 수 있는 복음이다. 좋은 것을 주는 방법으로 무력이나 강압이나 경제적 침투를 사용함은 합당치 않다. 민족적 자긍심을 손상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복음의 전파와 함께 민족의 발전을 도모하는 원려가 복음의 가장 아름다운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합당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