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한 대통령 그의 애국심 높이 평가

1965년 하와이 모라나니 요양원 7월 19일 0시 35분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날이 찾아왔다. 한국서 급히 온 양자 이인수 박사, 주치의 한국인 2세 토머스 민박사, 최백렬 동지회 회장, 프란체스카 여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우남 이승만 박사는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돌아가기를 원했던 서울 국군묘지에 가족장으로 안장됐다. 국민들이 길가로 나와 마지막 가는 위대한 애국자를 눈물로 추모했다. 실질적인 국장이었다. 1960년 5월 29일 오전 8시 30분 이승만 박사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태운 CAT 항공기가 김포공항을 이륙하여 하와이를 향한지 5년 2개월간 망명 아닌 망명이 될 줄은 두 사람 모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와이 도착 직후 월버트 최씨의 별장에 머물다가 6개월 후 그가 마련해드린 마키키 스츠릿의 한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동지들이 쓰던 가구와 주방기구들을 하나 둘씩 가져와 살림살이가 장만되었다. 국내에서 나돌고 있는 소문과는 아주 초라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옛날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과 같이 살림을 꾸려나갔다"고 밝혔다(‘대통령의 건강’에서).

1960년 6월 7일 정일형 의원의 제안으로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씨에 대한 ‘특정재산 조사위원회’ 가 구성됐다. 이화장을 삿삿이 뒤졌고 국세청이 해외 도피와 부정축제 등에 관한 소문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박사의 재산은 미국서 귀국했을 때 유지들이 사들인 이화장(2천평, 당시 시가 3억환)과 세계통신사옥(대지70평, 당시 시가 1억환) 등 조사결과가 나왔다. 실제, 이승만 박사는 하와이 교포들의 후원금으로 겨우 생활을 꾸려갔다. 이박사는 식사 때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했고 조국의 미래를 늘 염려했다. 고국이 그리울 때면 서쪽을 바라보며“바로 저쪽이 우리 백성들이 사는 데야”고국으로 속히 돌아가기를 원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매주 금요일마다 식료품을 구입하러 시장에 갈 때면 이박사는 언제나“남은 게 있는데 조금만 사와. 돈을 다 써버리면 서울에 못가”했다. 시장을 보고 들어오는 프란체스카 여사 손에는 항상 작은 봉투 하나만 들려 있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에 양자 이인수 박사가 뒤로 나가 남은 샤핑 봉투를 들고 부엌 뒷문으로 들어왔다. “무슨 형편에 남을 시켜 잔디를 깎느냐” 5불을 아끼느라 프란체스카 여사가 이발을 도왔다(‘이화장 춘추’이인수 박사).

이박사의 평생지기(平生知己)이자 조언자로서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로봇 올리버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이박사는 부패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터무니없는 소리다.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하와이 망명할 때도 돈 한 푼 가진 게 없이 왔고 교포들의 성금으로 살아야했다.” 대통령 재직시세도 마찬가지였다. 국고의 달러 지출을 철저히 챙긴 것은 널리 알려졌다. 교포들의 후원금으로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한 푼이라도 잘못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감이 늘 있었다. 스위스 국제대회에 참가했던 이승만 박사가 호텔식당에서 우연히 프란체스카 여사와 처음으로 한 테이블에서 식사했다. 그때에 어머니하고 같이 여행 중이던 프란체스카 여사가 충격적인 인상은 국제대회 한국 대표라는 이승만 박사가 주문한 식사메뉴가 고작 감자 몇 개하고 삶은 콩깍지였다. 두 모녀의 디너 메뉴와 각국 대표들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했다. 1930년대 이야기다. 그렇게 절약하며 독립운동을 한 이박사는 평생을 검소 절약의 생활을 하였다.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숨겨뒀다 발각된 전직 대통령, 비자금 축재 등으로 국민을 실망 시켰던 부패한 대통령, 정치판에서 아직도 일확천금을 꿈꾸는 얼빠진 정치인들과는 분명 달랐다. 이박사는 누가 뭐래도 청렴한 대통령이었다('가난한 대통령’ 중앙일보 현대사 전문기자). 수백억 원을 드려 대통령 마을을 짓고 사는 전직대통령을 비교해 볼 때 이박사는 가난한 대통령이었다. 이화장을 가보면 안다. 독립운동 시절부터 썼던 끝이 달아 용도폐기 상태인 면도솔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애국심과 청빈을 찬양한다.

김상모(이승만 박사 뉴욕기념사업회 회장:UMC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