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선교 현장의 글을 시작하며...
집시선교 현장에 있으면서 막상 집시선교 사역을 글로 옮기려하니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집시민족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딱히 정의하기에 참 어렵다는 점이다. 처한 환경이나 지역에 따라 집시민족의 삶이 너무나 다양한 모습들을 가지고 있어 독자들이 개중에는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때로는 알고 있는 집시 민족에 대한 지식과 달라서 동의를 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집시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서 집시민족의 실상을 바로 전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집시민족을 너무 부정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기 때문이다. 셋째는 선교사역의 현장에서 조용히 선교사역에만 매진해 왔는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일”이 아닌 “우리의 것”이 너무 드러날까 하는 조바심에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설이다가 결국 글을 쓰게 되는 이유는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유럽에서 “21세기 유럽의 불가촉천민”(21st-century Europe's untouchables)으로 살아가는 집시민족에 대해서 한국교회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함께 깨닫기 위하여 참으로 부족하기 그지 없지만 용기를 내서 동유럽 집시선교의 현장에서 경험하고 또한 진행되고 있는 선교사역에 대한 생생한 소리를 글로 옮기려 한다. -헝가리 최영 집시 선교사-

집시민족과의 첫만남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 신대원에 입학을 하였고 졸업과 동시에 국내 항만에서 선원선교 사역을 만 7년을 감당하고 난 후에 2003년 8월 새로이 선교지 정탐을 위해서 동유럽, 헝가리와 루마니아를 방문하게 되었다. 헝가리의 집시촌을 방문하기 위해서 부다페스트의 공항에 내렸는데 데브레첸의 바가밀 집시교회 사역을 하고 있는 집시 목회자 쫑카 요셉(Csonka Joseph) 목사 부부가 마중을 나왔다. 영화에서나 한 번 볼 수 있을까 싶은 집시 목회자를 공항에서 만남으로 나에게는 난생 처음 집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쫑카 목사의 안내로 데브레첸 인근 집시 마을 몇 군데와 루마니아의 집시 마을을 방문하였는데 마을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참으로 힘겹게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 눈에 띤 모습은 채 아홉 내지 열 살도 되지 않은 사내아이가 입에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이나 한 번도 빨아 입지 않아 땟자국이 주르르 흘러 보이는 여자 아이의 모습 그리고 대다수의 집시 아이들의 몸에서는 생선 비린내와 같은 이상한 냄새들이 얼마나 심한지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루마니아의 집시 마을을 둘러보기 위해서 국경을 넘어 국도로 가는 길에는 몸을 팔기 위해서 호객하는 집시 여자 아이들의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계속해서 집시 마을을 방문하면서 집시 형제들과 교제도 나누던 중에 한 번은 그들에게 대접이라도 할까 해서 음식점으로 초대를 하게 되었다. 집시 형제들이 음식점에서 음료수를 비롯해서 샐러드, 스프 그리고 메인 접시 등의 순서로 주문을 했는데 참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음료수를 주문할 때였다. 한 사람이 콜라와 오렌지 주스를 같이 오더를 하는 것이었다. 누군가 옆에서 하나만 주문을 하라고 하니까 자신은 콜라도 주문을 해야 하고 또 주스를 좋아하기에 더불어 주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다수의 집시 형제들이 콜라와 주스를 함께 주문을 하였다.

그리고는 메인 접시 등 모든 주문을 마치고 잠시 기다리고 난 후에 주문했던 음식이 나왔는데 상상이 안갈 정도의 많은 양의 음식이었다. 이유는 메인 접시 중에 “두 사람을 위한 접시”가 있는데 그 접시를 하나씩 주문하다 보니 엄청난 양의 음식이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금 콜라를 숫자에 맞춰서 또 주문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에는 음식 값이 얼마였는지는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음료수 값이나 메인 음식 값이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는 많은 양의 음식을 다 먹지도 못하고 남기고 나왔던 기억이 있다.

이후에 데브레첸 인근에 “홀토바져”라는 국립공원이 있는데 그리 멀지 않으니까 잠깐 바람이라도 쐬러 가자고 제안을 해서 그러자고 하여 가기로 했는데 어디서 차를 구했는지 모르지만 허름한 승용차 3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를 세어보니 약 20여 명에 가까운 집시들이 함께 국립공원에 가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수가 함께 국립공원에 갔는데 어떤 연유였는지는 잘 모르나 문이 닫혀서 다시금 돌아와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주유소에 들러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서 주려하니까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결국 그냥 돌아오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 봐도 아찔하기만 하다. 만약에 국립공원에 들어가게 되었다면 그 입장료는 얼마고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 것인지... 그렇게 집시 형제들과의 처음 만남의 과정들이 있었는데 그 때에 받았던 느낌은 “함께 어울려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그리고 “생각이 부족하다”라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집시 선교사로 부르시는 하나님
쫑카 요지 목사와 헤어지고 사보 다니엘 목사님을 만나기 위해서 샤로스파탁으로 왔다. 사보 다니엘 목사님은 헝가리 개혁교회 증경 부총회장을 역임하시고 헝가리 세계선교 연합회 회장, 헝가리 개혁교회 장로회 연합회 회장, 샤로스파탁 신학교 선교학 교수 등 아주 커리어가 화려하신 분이신데 막상 만나 뵈니까 천주교의 전임 수장이었던 요한 바오로와 비슷한 외모를 가지신 인자하신 할아버지와 같으신 분이셨다. 한 주일 동안 사보 목사님과 동행하면서 교회 방문, 컨퍼런스, 심지어는 장례식까지 아침 기상과 함께 저녁에 침실에 들어가기 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그분의 삶을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특이한 것은 사보 목사님께서는 독신이셨는데 조심스럽게 여쭈어 보니까 시간이 없어서 결혼을 못하였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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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 목사님은 공산주의 시절을 경험하셨던 분이셨기에 공산주의 아래서의 동유럽의 교회의 모습 등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또한 목사님은 바뿐 가운데서도 틈틈이 집시 마을을 방문하셔서 교제를 하시는 집시 형제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어려운 형편을 살피고 그들에게 복음을 통해서 위로하시는 모습들을 지켜 볼 있었다.

사보 목사님과 동행 하던 중에 목사님의 동역자인 러시아 국적으로 헝가리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헬레나라는 자매와 그의 딸인 유나를 함께 만났다. 마침 저녁시간이어서 음식점에 들어가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다니엘 목사님은 메인 접시가 작은 것을 주문하셨고 헬레나와 그의 딸 유나는 접시 하나를 주문해서 나눠먹는 모습을 보았다. 다니엘 목사님이나 헬레나 자매는 정말로 근검절약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며칠 전에 집시 형제들과 함께 식당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사보 목사님과의 만남도 한 주일이 쉬 지나가면서 헤어지게 되었는데 부다페스트의 켈레티(동)역에서 나의 두 손을 꼭 붙잡으시면서 “최 목사, 다시금 헝가리로 와서 집시 형제들을 위한 집시선교 사역을 감당해 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헝가리를 떠나면서 비행기에 올라 돌아오는 길에 힘겹게 살아가는 집시 형제들의 모습 또한 지난 한 주일 동안 함께 하였던 사보 다니엘 목사님과의 시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역에서 헤어지시면서 부탁하셨던 그 모습이 오늘 집시선교의 현장으로 이끌었고 이 또한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확신하면서 동유럽 집시선교 사역에 발을 딛게 되었다.

오늘 동유럽의 선교 현장에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마 9:37)라고 외치시는 주님의 탄식을 듣게 된다.

후원문의
동유럽집시선교회(The Crossway Mission With Christ) 본부 최정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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