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일생-1

메시야 한미 연합 루터 교회를 섬기고 있는 박 민찬 목사입니다. 이번 주부터 루터란 컬럼란을 맡아서 매주 아틀란타 한인 교민들에게 찾아가게 됨을 먼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미국에서의 최대 교단 가운데 하나인 북미주 복음주의 루터 교단에서 목회한지 만 11년 그리고 12년차가 되는 목회자입니다. 많은 한인 교회나 교우들께서 루터 교회에 대한 인지도가 그리 많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바 이번 기회를 통하여 루터 교회에 대한 부분들을 아틀란타 한인 교민들에게 알려드릴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부터 루터 교회에 관한 일반적인 부분들을 알려드릴 것인데 우선 이 자료는 루터 교단에서 나오는 일차 문서 또는 자료에 철저하게 근거한 것임을 먼저 밝혀 드립니다.


1. 루터 교회란?

루터교회는 중세교회가 성서적 신앙으로부터 멀어져 있을 때, 1517년 종교 개혁의 횃불을 들고 일어났던 말틴 루터 박사에 의해 시작된, 종교 개혁의 선두에 선 교회로서 개신교의 장자교회이다. 전 세계적으로 장로교·감리교보다 더 큰 교회이지만, 한국에서의 선교는 다른 개신교회보다 70~80여 년 늦게 시작되어 아직은 작은 교회이다.

루터교회는 신·구약 성서를 신앙과 생활의 절대 규범(Norma Normans)으로 믿으며 세계적 보편신조인 사도신조, 니카야신조, 아다나시안신조를 제2의 신행 규범(Norma Normata)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루터교회(Lutheran Church)는 신약의 기독교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에 서 있는 교회이며, 16세기 말틴 루터(1483-1546)의 종교개혁에 의해 재발견된 복음의 가르침 위에 서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한 이름없는 수도사였던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제성기념일 전야에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城)교회의 문에 붙인 것으로부터 촉발된 작은 개혁의 물결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결국에는 전체 서방 기독교 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루터교회의 모태가 될 뿐만 아니라,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의 출발이기도 하다.

‘루터란(Lutheran)’이란 말은 ‘루터를 따르는 놈들’이라는 말로서 카톨릭 교도들이 붙여준 것인데 결국 교회 이름이 되었다. 개혁의 주체였던 루터와 그의 동료들은 “믿음만으로, 은총만으로, 성서만으로!”라는 3대 기치를 내걸고 바른 교회로 돌아가기 위하여 목숨을 건 투쟁을 하였으나, 과격한 다른 개혁자 교회들과는 달리초대 교회로부터의 아름다운 전통을 잘 계승하며 발전시켰다. 즉, 아름답고 올바른 예배 의식과 음악, 매 주일 행하여지는 성례전을 통해 모범된 공동체를 이룩한 것이다. 또한 일반 신자를 위해 성서가 번역되어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되었고, 회중 찬송도 만들어져 힘차게 불려졌다.


2. 루터의 출생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아이슬레벤에서 한스 루더와 마가렛 루더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나중에 루터가 죽었을 때의 떠들썩함과는 달리, 그의 출생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와 그의 친구들은 정확한 출생연도를 가지고 실랑이를 벌일 정도였다. 루터의 아버지는 자영 농민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린데만가 출신이었다. 루터는 당시 관습에 따라 출생 다음 날(성 말틴의 날) 세례를 받고 그 날의 성인의 이름을 따라 말틴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젊은 시절의 루터는 아버지를 빼 닮았다. 루터의 아버지 한스는 매우 근면하고 야심있는 사람이었다. 농부였지만 지방 상속법에 의하면 가족의 땅은 고스란히 막내 아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둘째 아들 말틴이 태어나기 전에 고향인 뫼라를 떠나야만 했다.

3. 루터의 교육
루터의 가정은 엄격하면서도 다정다감하였다. 그의 부모는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절약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또한 아이들에게 가족이 하는 모든 일은 존경을 받아야 하며 생산적이어야 한다고 배웠다. 루터는 어릴 적에 어머니가 땔감을 구하러 다른 부인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가시곤 했다고 회상했다. 루터의 부모는 자녀들에 대해서 커다란 야심이 있었다. 저들은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 아이들이 잘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루터가 다섯 살 되던 해(1488) 만스펠트의 마을 학교에 취학하여 라틴어를 읽고 쓰는 교육과 성가대 찬송을 위한 음악교육을 받았다. 13살 되던 해(1497) 루터는 마그데부르크로 보내어져 성당 학교를 1년간 다녔는데, 교사들은 ‘공동생활 형제단’의 일원이었다. 이렇게 해서 루터는 청소년 시절에 중세시대 전체에 있어서 가장 깊은 차원의 평신도 영성 훈련에 익숙했고 친근해졌다.

이듬 해 루터는 아이제나하로 보내어져 3년간 공부하였다. 루터는 이 학교에서 그의 장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칠 요한 트리보스 교장 선생님을 만났으며, 비간트 겔드누프란 스승과는 평생 계속되는 친교를 여기서 시작하게 되었다. 이 두 스승은 루터의 재능을 알아보고서 졸업이 다가오자 대학에 가서 계속 공부하라고 추천하였다. 루터는 아이제나하에서 그의 발전에 중요한 이들을 많이 만났다. 그는 경건하고 학식있는 상류층 가문인 샬베와 코타의 집들을 자주 방문하면서 저들의 심오한 경건 생활에서 깊은 감화를 받았다. 이들 가정의 분위기에는 프란시스회의 영성이 물들어 있었으며, 음악성도 계발되었다. 루터는 아이제나하에서 많은 친구들도 사귀는데 이들 중 몇은 평생지기가 된다.

4. 루터의 대학교육
당시 루터의 부친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들을 대학에 보낸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그는 아이제나하 선생님들의 대학 진학 계획에 찬성하였다. 루터의 아버지는 아들을 법률가로 만들어 좋은 자리를 얻게 하려고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시켰다. 루터는 이 대학 교양학부에서 삼학(三學 - trivium. 문법, 수사학, 변증법)과 사학 (四學 - quadrivim.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을 각기 마친 후 1502년 9월에 문학사 학위를, 1505년 1월에 17명 중 차석으로 시험에 통과하여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예비학교를 마친 루터는 5월에 본격적으로 법률 공부를 시작하였다.

5. 루터 수도원 가다
루터가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 하던 중, 집에 갔다가 에르푸르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7월 2일, 슈토테르하임 근처에서 무시무시한 벼락이 옆에 떨어지는 순간 루터는 땅으로 엎어지면서 광부들의 수호성인을 부르며 소리질렀다.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저는 수도승이 되겠습니다.”수도원에 들어가려는 생각이 이미 무르익었던 터라 루터는 뇌우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루터는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7월 17일,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은둔자 수도회” 소속 “검은 수도원”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