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를 맞으면서 많은 지면들이 새 시대에 대한 비전과 개혁을 위하여 할애되어 왔다. 그리고 다양한 소신과 견해들이 개진되었고 또 계속적으로 이러한 미래를 위한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인간의 지혜와 노력이 얼마나 재림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길을 열어 가는데 기여할 것인가도 생각해 본다.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이나 예배갱신의 문제, 찬양, 교회의 운영형태(예: 셀 처치, 가정교회, 목장교회, 사랑방교회 등등), 열린 예배, 이런 것들이 다가오는 앞날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이다.

이러한 모든 과제들은 모름지기 주님이 “천국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되리라”하신 말씀의 여망에 따라 모든 노력의 초점이 맞추어 져야 할 것이다. 이 말씀은 마28장18절 이하에 기록된 복음전파의 지상명령인데, 이 주님의 재림을 얼마든지 늦출 수 있다고 억의(抑意)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계2장16절이나, 계3장11절의 “내가 속히 오리라”는 말씀, 그리고 딤후4장2절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써 복음을 전파하라”는 바울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복음은 신속히 전파되어야 하고 주님의 재림도 속히 이루어져야 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과거 어느 때보다도 인간의 지식이 바벨탑 수준에 이르는 오늘날, 인간의 마음 속에 어떻게 복음이 받아지게 하느냐의 문제는 인간 지놈(Human Genom)의 재간으로도 쉬운 일이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구원을 외치는 교회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시대와 사회에 대하여 어떤 입장과 위치에 서 왔었는가를 살피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원시시대에 있어서 공산적인 생활 형태, 평정의 시대, 부족사회에 있어서의 원시적인 종교가 형성되고, 히브리 문화와 헬라 문화의 흐름 가운데서 예수의 피 흘림에 의하여 초대교회가 탄생하였다.

고대시대(로마), 귀족과 노예계급의 시대, 노예가 하나의 짐승으로 취급되었던 시대(Pax Romana)에는 교회는 생명이 넘쳐 있었다. 가정교회와 지하교회 또는 카타콤교회가 이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이같이 생명이 넘치던 교회는 그 입장을 권력의 자리로 옮겨 가고, 생명은 사라지고 몸체만 비대해 갔다. 세속화한 것이 아니라 세속주의가 되어 간 것이다.

중세 시대에 이르러서는 노예나 귀족이 아닌 기사도가 등장하였고, 사회는 왕과 영주 그리고 농노의 계급으로 나뉘어 교회는 왕과 영주를 위한 신학을 만들어 내어 교회가 진정한 세속을 모르고 세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러한 때를 아마 암흑의 시대라고 부른 것 같다. 교회는 소수의 지배자적 입장에 편승하였기에 다수의 민중에게는 암흑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예부흥(Renaissance)이 일어났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역사의 흐름이었을 것이다. 중세시대가 물러가고 근세시대가 도래하면서 자본주의와 노동자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생산의 증대와 이에 따를 소비의 문제로 인하여 식민지 국가가 탄생하고 열국 간에 새로운 영토분쟁을 일으키게 되면서 교회도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 건설보다도 영토 확장을 위한 자국주의 선교라는 이름으로 복음전파에 노력을 기울였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독립 자본주의가 형성되면서 교회역시 자본주의의 발전과 아울러 기업적 지교회의 입장에서 다만 교회의 방주개념(개인 구원)만을 강조하였다. 몇 년 전 로마 교황 바오로 2세의 참회선언도 그 동안 잘못되어 왔던 교회의 입장을 선회한다는 뜻으로 이해되고 최근 바티칸이 갈릴레이 조각상을 바티칸궁 정원에 세우기로 했다는 것도 400년 만에 교황청과 갈릴레이 간의 화해를 위한 궤도 수정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과연 교회의 거룩성과 세상성에 대하여 단견이나마 생각해 보고자 한다. 교회의 거룩성과 세상성에 대하여 말할 때, 그 거룩성과 세상성은 일치하는 양면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일상에 사용하는 “돈”이라고 하는 화폐는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치와 상징의 양면이 있다. 교회의 거룩성은 죄악세상에서 자기보전의 일면이며, 세상성은 교회가 세상을 파헤치고 들어가 소금과 빛으로 존재해야 하는 일면이라고 볼 수 있다. 한 알의 밀알이 색칠한 꽃바구니에 홀로 남겨있어 언제까지나 귀중한 생명을 잉태한 존재로써만 남아 있을 것이 아니라, 검은 땅에 떨어져 썩어 검은 흙을 떠 바치고 움이 트고 새싹이 돋아나는 것 같은 양면 일치의 사실이다. (다음에 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