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한국교회의 주일 예배 시간에 한 미국인 선교사가 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선교사는 예배시간 내내 왠지 어색하게 예배를 드리더니, 예배를 마친 후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선교사가 “한국교회는 예배 시간에 항상 심각한 분위기로 예배를 드립니까? 예배 전 교회에 들어서기 전에는 교인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기쁨이 있고, 소망도 있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배당에 들어서면서부터 예배가 진행 되어지는 내내 교인들의 모습에서는 그 어떤 기쁨이나 소망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무슨 이유라도 있는 것인지요?”라고 묻자 목사는 이렇게 궁색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우리 교인들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멸시천대를 받으며,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이렇게 엄숙하고, 숙연하여지며, 진지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라는 대답에 선교사는 의아해 하며 되물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십자가에 고난 당하사 죽으신 예수는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며, 구원의 소망이 되시는 예수라는 것을 한국교회 교인들은 믿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되물었다고 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활에 대한 소망과 구원의 확신입니다. 부활의 확신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마음을 굳게 하여 흔들림이 없이 우리의 믿음을 든든히 세워 나갈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노라’하면서도 작은 일에 낙심하고, 믿음에 든든히 서지 못하는 것은 부활의 소망과 구원의 확신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주를 따르던 제자들도 주님의 부활을 경험하기 전에는 예수님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믿음은 한낱 떨어지는 가랑잎같이 하찮은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당당했던 수제자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 “영생에 말씀이 여기 계시매 내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되묻던 베드로, “주여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5)”, “주여 내가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눅22:33) 라고 장담하던 그는 누가 보아도 철저하게 주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죽음만을 보게 되었을 때 그는 좌절하고, 실망한 나머지 예수님을 배신하고 옛 직업으로 돌아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부활의 소망은 물론이고, 구원의 확신조차 없었던 나약한 한 어부의 모습이며, 실패한 제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또 다른 제자들 중 요한복음 21장 1절 이하를 보면 어부 출신도 아닌 도마와 나다나엘도 베드로와 함께 고기잡이에 따라 나셨던 것을 보아 그들에게도 부활의 소망은 찾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예루살렘을 버리고 엠마오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로써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교육, 교통과 정치 더 나가서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사람들의 습성은 도심을 중심으로 삼아 살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없는 예루살렘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왕래도, 풍요로운 도시 환경도 그들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없으니 모든 기대가 사라진 채 엠마오라고 하는 조금한 시골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모르는 삶은 이렇게 모든 제자들에게 있어서 소망의 단절이요, 기쁨의 상실이며, 슬픔과 고통과 절망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공포와 두려움과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 옆에서 천국 말씀을 배우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38년된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고, 소경이 눈을 뜨며,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며,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들 앞에서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이스라엘의 왕이 됨을 또한 자기들을 구원할 메시야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는 그들은 예수의 죽음 앞에 겁쟁이요, 비겁자요 도망자의 허약한 모습을 보여 주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의 기적이나, 더 이상에 소망이 없었습니다. 예수가 없는 인생은 슬픔뿐이요, 예수를 잃어버린 삶은 절망뿐인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처럼 부활을 생각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죽음만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속엔 어떤 기쁨이나, 소망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절망 속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고기잡이를 하고 있던 베드로에게 부활의 예수님은 함께 하시며, 소망과 확신을 주셨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은 눈을 밝혀 깨닫게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벅차고 감격스러운 마음은 제자들의 발걸음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시 찾은 믿음으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열심히 모여 마음을 다하여 뜨겁게 기도했고, 순교의 제물이 되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어리석고, 초라했던 그들의 모습이 변하여 신앙의 선진으로써 온전한 몫을 감당하게 되었고, 우리들에게 부활의 소망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갖는 다는 것은 믿음의 확신을 갖는 것이요. 우리 믿는 자들을 견고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고통에 눌려 고난의 찌든 얼굴을 하고 절망을 친구 삼아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맙시다.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며, 참 자유와 모든 억매이게 하는 것에서 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고, 믿는 자들이 기뻐하며 살아가는 근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도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 기쁨을 만 천하에 전하는 어려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 속에 진정한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