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거부하는 이방인은 진멸돼야 합니까? 그들은 힘으로 억제돼야 합니까?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향하는 예수님과 제자의 “여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사역을 정리하고 이제 사마리아를 거쳐서 예루살렘을 가시기 위해, 한 마을을 통과하시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그 마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분노한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우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멸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하고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를 꾸짖었습니다.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린 야고보와 요한의 태도는 기독교에 대한 거부를 표하는 사람과 불신자를 대하는 과격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종말론적으로는 큰 심판의 불러일으킨다 하더라도 아직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불신자나 신앙을 거부하는 자라 하더라도 관용과 관대함으로 대하여야 함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아니 믿는다고 해 진멸한다면, 시간이 지난 후에 변화돼 믿게 되는 사람마저도 모두 진멸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국내전도와 세계선교를 하는 데 있어서도 불신자를 향해 우리가 늘 온유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종종 그렇지 못했습니다. 기독교는 종종 힘을 배경으로 해 선교했습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기독교가 제국주의적 팽창의 주도권을 쥐고 선교할 때, 피선교국은 어떤 형태로든지 상처를 받았습니다. 중국의 경우, 북미의 인디언 경우, 남미의 경우 등, 그야말로 선교의 과정은 힘든 토착문명 훼손과 문화제국주의 부산물을 만들면서 진행됐습니다. 종교가 신정국가 형태를 가졌던 구약시대는 어찌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지금도 기드온 식으로 힘에 의존하는 전도방식은 옳지도 않고 효과적이지도 않습니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도 힘의 기독교를 통해 선교를 했으면 좋겠다는 입장은 “황사영 백서사건”(1801)으로 나타났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대체로 온건했던 정조시대 이후, 순조가 즉위하면서 발생한 남인시파의 숙청과 기독교 박해가 심해졌습니다.

입국해 전교하는 주문모 신부가 죽고, 신자가 수백 명이 살상되는 상황에서 황사영은 선교를 위한 서양함선 무력시위를 요청합니다. 적발된 편지는 가혹한 박해를 위한 구실을 제공합니다. 예수님과 바울은 힘에 의존하는 방법이 아니라 핍박을 받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복음의 진리는 힘의 기독교가 아니라 사랑의 기독교와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