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사람이 성령충만한가의 척도를 말할 때, 그 기준이 애매모호 할 때가 많다. 주로 성령충만한 사람은 기도할 때 일단 목소리가 커야된다고 생각한다. 소리를 지르며 침도 튀겨야한다. 그리고 성령충만할려면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마이크를 잡고 “쉬”하고 바람소리를 내면서 주여를 힘주어 “쥐-여”하는 발음을 내야 왠지 분위기가 압도적이되며 성령이 역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좀 우스운 소리같지만 사실 많은 기도원과 교회에서 이런 방법이 성령역사의 방법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목사님께서 마이크에 대고 바람소리를 많이 낼수록 성령의 역사는 더 강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으시는 우리의 제사는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에 있는 것이다.

윌로우 크릭교회의 빌하이벨스 목사님이 말하길 “교회에서 사역비젼을 제시하고 선교사명과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목표로 삼고 이것을 강조하지 않는 교회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어느 교회에서든 ‘우리가 어려운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자’고 강조하지 않는 교회는 단 한곳도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그것을 설교하고 강조하고 호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에 대해 실천하는 교회는 적다고 덧붙이신다. 말은 누구나 다 하는 것이다. 남에게 보이는 것은 적당하게 그럴 둣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에 대한 댓가를 지불해야 될 때는 피했던 것이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 아닌가 돌아본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예배 자체에 도취되는 것 이상으로 그 예배를 통해 받은 은혜가 실제로 삶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다. 어느 저명하신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길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우리가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의,식,주 등)로 인해 실수를 했을 때 더 불쌍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셨다. 필자는 장애인으로서 그 말에 많은 공감을 갖는다. 남들은 언제나 늘 갖는 기본적인 필요를 누군가가 일평생에 한번도 갖질 못해 그로인해 실수를 저질렀다면, 마치 장발장 같이 배가 고파 빵을 훔쳤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실수한 그가 아무 잘못이 없고 그 고통이 다른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심으로 인한 사회적 병폐와 차별로 인해 받게 된 것이라면 그 죄과는 함께 나누지 못한 이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사랑을 전파하고 나누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고귀한 사랑이다. 그 사랑은 친한 사람끼리만 재미있고 반가와 나누는 이방인의 사랑을 넘어서 상대의 필요를 따라 희생하며 나누는 사랑이다. 특별히 한인 사회에서 남도 아닌 같은 동포로서 소외되고 어려운 이들이 장애인들이건만 한인교회의 그들에 대한 관심도는 사실 미약하다. 교회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무척 강조하면서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삶가운데 드리는 진정한 예배는 너무 외면하고 있지 않는가’하는 점검을 해 보아야 한다. 차라리 예배의 의미를 강조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덜 섭섭해 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이든다. 교회는 더 많은 재정을 장애인을 위해 쓰며, 더 많은 장애인들을 수용하고 또한 장애인 사역자들도 채용해야 하는 것이다. 장애인 직원들도 채용하는 등의 실질적인 차원의 사랑의 나눔이 필요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느 시각장애인 교회의 모토를 다시 생각해본다. “장애인을 섬기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