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이 있습니까?”

차분하게 대국민 호소문을 읽어내려가던 그녀도 이 대목에서는 더 이상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그간 고국의 푸대접 속에서 외로이 싸웠던 회한(悔恨)이 짙게 배여있었다. 말없이 웃고 있는 남편의 사진 아래 앉아 국민들을 향해 호소하고 있는 그녀는 8년 전 납북돼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 故 김동식 목사의 아내다.

김 목사는 지난 2000년 1월 16일 중국 연길교회 인근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다 북한공작원들에 의해 납치당했다. 장애인이었던 그는 중국에서 장애인들을 돕다 탈북자들을 만나게 됐고,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들을 돌보는 한편 한국으로 데려오는 일을 함께했다. 익명의 한 탈북자는 “김 목사가 북한 선교를 하다 납북된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탈북자들을 돕는 동시에 북한 선교를 위해 탈북자 중 몇몇을 선교사로 역파송했다는 것이다.

결국 북한당국은 김 목사를 ‘국가전복 음모자’로 지목해 치밀한 계획 속에 납치했고, 그에게 온갖 위협과 회유로 탈북자를 도운 것을 회개할 것과 주체사상에로의 전향을 강요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전향을 거부해 갖은 고문을 당했고, 결국 80kg이던 몸무게가 35kg으로까지 줄어드는 등 영양실조와 고문후유증, 폐쇄공포증 등으로 직장암 등이 악화돼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그는 평양근교 상원리 소재 조선인민군 91훈련소 위수구역에 안장돼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28일 오후, 그녀는 남편의 유해라도 돌려받기 위해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같은 시각 열린 한기총 대표회장 선거 탓인지 기자회견장은 어느 때보다 썰렁하다. 그녀는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께 간절히 호소합니다. 대한민국의 아들인 김동식 목사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대한민국 정부가 일하지 않으니 국민 여러분들이 나서 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여러 경로를 통해 김 목사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지만, 그녀는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듯 했다.

그녀는 남편의 납북 이후 남편 못지 않게 괴로운 삶을 살아야만 했다. 몸이 성치 않던 그녀는 남편의 납북으로 우울증에 시달렸고, 유방암에 걸려 수술까지 받았다. 남편이 고생할 것만 생각하면 약이 넘어가지 않아서 우울증 약도 먹지 못해 병세는 좋아지지 않았고, 정신병원 신세까지 져야 했다. 미국에 살던 그녀는 고국에서 남편 구명운동을 벌이고 싶었지만, 아픈 몸 때문에 이제서야 고국 땅을 밟게 됐다. 4년 전 한번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신병 치료차 방문해 다른 일은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호소문을 다 읽고도 못내 아쉬웠는지 미처 다 하지 못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남편이 미국 영주권자라 미국민들이 격려해 주고 관심이 참 많습니다. 일본에서도 납북피랍인 가족들을 중심으로 저에게 관심이 많은데 왜 정작 고국인 한국에서는 이렇게 관심이 없는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 한달 전 각각 서한을 보내 남편의 생사여부 확인과 사망시 유해송환을 요청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 “미국에서는 하원위원장이 국무성으로 저를 초청해서 6자회담 전제조건으로 남편의 생사여부와 유해송환을 약속했어요.” 한국정부는 햇볕정책과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북한에 눈치만 보다 김 목사 얘기는 꺼내지도 않는 상태다.

호소문을 발표 전에는 서경석 목사가 “한국과 한국교회가 그동안 너무 김동식 목사에게 무관심했다”며 교계의 관심을 촉구했다. 그녀의 방문을 계기로 기독교사회책임과 탈북피랍인권연대를 비롯한 북한인권단체들은 △유해송환운동본부 결성 △서울 광화문에서 유해송환 촉구 정기집회 매주 실시 △자국민 보호의무 소홀 항의표시로 외교통상부와 통일부 방문 및 직무유기 고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 제출 △국회 유해송환결의안 채택 촉구 △국제인권단체들과 연대해 각국 북한대사관에 항의서신 보내기 운동 전개 △유엔인권위원회에 진정서 제출 등 생사확인 및 유해송환활동을 계속해서 펼쳐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사랑의교회(담임 오정현 목사) 전도사 출신인 그녀는 방한기간 중에 지인들과 아는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지난 13일 입국한 그녀는 김정일에게 죽은 3백만명에 대한 추모제 참석과 지난 2005년 남편의 납북문제를 조사했던 김문수 경기도지사(당시 국회의원) 면담 등의 일정을 소화했다.

“미국에 돌아가서도 운동을 계속 해 나갈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도와 주십시오.” 그녀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한기총을 찾아 정연택 사무총장을 만났고, 29일 김 목사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탈출시킨 탈북자들과 만난 후 오는 30일 출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