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티에 대해서 제가 알고 있었던 것은 단지 카리브의 휴양지의 근처정도에 있는 나라라는 것과 정치적인 면에서 불안한 나라는 사실뿐이었습니다. 이번 하이티 선교지 방문은 새로운 선교의 감동을 안고 돌아온 방문이었습니다.

93년도 교회를 개척하며 시작된 단기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동남아로 그리고 중남미로, 미 원주민 선교사역들을 위해 몇몇 작은 교회들이 함께 모여 청소년들과 함께 단기 선교를 기획하고 선교지를 방문하고 선교하는 동안 더운 여름에 잠잘 곳이 없어 먼지 나는 교회 콘크리트 바닥에서 슬리핑 백을 깔고 자고 때론 물이 없어 빗물을 받아 세수 하면서 지냈던 선교지의 추억들이 목회 하면서 많은 감동들이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저만이 가지는 감동이나 추억은 아닐 것입니다. 단기선교를 위해 헌신하는 모든 교회들이 가지는 추억과 감동들이라 생각이 듭니다. 저는 선교의 전문가도 아닙니다. 12년 전 함께 선교지를 가보자는 어느 목사님의 권고가 제 마음의 문을 열어놓았고 그리고 선교지를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교회들이 같이 모여 선교를 갔었고 이젠 선교가 좋아 보이고 앞으로 선교지를 사랑해야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여전히 단기 선교의 이야기가 나오면 가슴이 떨리고 흥분이 되는 것이 아마도 주님의 마음을 담았기 때문이라 생각이 듭니다.

11월 6일 도미니카 공화국의 작은 공항에서 하이티를 향해 12인승 쌍발 제트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12년 동안 매년 많은 비행기를 탔지만 12인승의 프로펠러로 움직이는 작은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심하게 들리는 비행기 소음 속에 45분간의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Port au Prince 의 비행장에 도착했습니다. 국제 비행장이라고 하지만 비행기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움직이지도 않는 작은 비행기들이 별도의 곳에 버려져 있었고 우리들이 타고 온 작은 비행기 한대밖에 없었습니다. 세관검사 후에 비행장 문 앞에 나왔을 때 수도의 첫 번 모습은 수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었습니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짐을 날라준다는 사람들이 다가옴이 심상치 않았고 같이 동행했던 하이티의 한식민 선교사님의 부탁은 여행백을 손에서 꼭 쥐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정말 놀란 것은 젊은 사람들의 기다림 , 그들은 여행객들이 짐을 날라주어 몇 푼의 수고비라도 받아야 하겠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프랑스말이 에스파냐어 보다는 조금은 친근해 보였지만 가까이 오는 사람들의 무서움보다는 짐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가방의 손잡이를 굳게 잡은 내 손은 땀이 나 있었습니다.

미국에 이민 와서 이민 교회를 하면서 선교의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2년간 선교의 준비의 총 책임을 담당하면서 많은 노하우를 가지고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국경을 넘어설 때 넘어가면서 겪었던 어려운 일들이나 선교 기간 중 단원들의 아픔으로 인해서 한밤중에 응급실로 가서 한밤을 지내야 했던 일들, 선교팀의 짐을 잃어버려 비행장에 몇 번 가야만 했던 일들과 트럭을 개조해서 만든 택시에 탔다가 졸다가 차에서 떨어질 번했던 경험들, 멕시코 산간지방에서 한밤중에 교회 앞에서 일어난 총격 사건 때문에 의자 밑에서 밤을 지새웠던 일들…….너무나 많은 일들이 선교 기간 중에 일어났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들이 하이티 선교지 방문에 담대함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건 수도를 가로질러 가야하는 약 1시간의 시간 때문이었습니다.

세인막에서 마중 나온 사무엘 하이티 전도사님과 함께 차를 렌트해서 수도를 지나는 길목은 이제까지 다녀본 선교지 가운데 가장 열악한 곳이었습니다. 1번 국도를 따라 거의 1시간동안 보이는 수도의 가운데는 쓰레기장이었습니다. 저마다 가지고 나온 작은 물건들을 서로 사고 파는 곳, 이리 저리 버려진 채소들의 찌꺼기 더미들에서 나오는 악취와 거리에 가득한 매연들, 우리는 상상도 못한 나라에 와 있었습니다. ' 세상에 저기 봐요!' 차를 타고 가며 대화했던 말 가운데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었습니다.

할 일이 없어 거리에 나와 앉아 있는 청년들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앞만 바라보아야 했던 1시간의 시간은 너무 긴 시간들이었습니다. 하얀 색깔의 장갑차들과 기관총들을 가진 유엔군들의 차량들이 이 나라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내정으로 인한 가난들, 그리고 미래가 없어 보이는 이들의 모습들이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내 눈에 눈물이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이티는 눈물의 나라입니다. 눈물이 쏟아져야 할 사람들이 있어야 할 나라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이티의 아름다운 해변들은 아직은 낭만을 느낄 만한 여유를 주질 못했습니다. 1시간을 지나 도착 한 로저목사님의 선교지 센터는 3층의 불럭을 지은 건물 안에서 로저 목사님과 사모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이어 하이티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사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오랫동안 하이티 수도 끝자락에서 선교의 열망을 가진 그들의 모습에서는 공포나 두려움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1시간여 이런 저런 선교지 사역들을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모습 속엔 선교의 불모지에 대한 깊은 사랑의 마음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작은 건물 안에서 하이티를 품은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귀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오래되어 쓸 수 있을까 생각이 드는 몇 대의 타자기 앞에서 열심히 타자 연습하는 젊은 여청년들, 손으로 만들어내는 수공예 기술을 배우기 위해 둘러 앉아 있는 여성들의 가슴엔 무엇으로 가득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단지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까? 그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좁디 좁은 선교 센터의 작은 방안에서 이들의 마음속엔 주님이 주신 미래를 향한 뜨거운 열정, 곧 자신의 나라에 대한 복음의 열정이 심어져 있었으리라 믿었습니다.

면담을 마친 후 만난 1.5세의 박 목사님과의 점심은 의미 있는 만남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가족들과 헤어져 공항 근처에 센터를 구축하고 젊은 하이티의 청년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기를 애쓰는 박 목사님의 사역지를 돌아볼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달에 500불의 렌트비로 마련한 센터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청년사역하는데에 좋은 자리였습니다. '요즘 영양실조에 걸린 것 같습니다. 밥을 못 먹어서가 아니라 한국 음식을 못 먹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라며 웃음으로 이야기하는 그 말이 이해가 될 듯합니다. 도미니카는 그런대로 한국 식품점이 있어 한국 음식을 살 수도 있지만 하이티에선 생각도 못할 일입니다. 그렇다고 밖에 나가 하이티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낭만도 없는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선교지에서의 고추장 하나가 살맛나게 하는 것도 이해가 될 것입니다. 언젠가 태국 치앙마이로 46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갈 때 한국 비행기 안에서 고추장 튜브를 몇 개 얻은 게 태국의 산꼭대기 마을에서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게 되었는지 그때 일을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났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난 아이들도 그 맛을 잊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때에 함께 했던 고등학생들 가운데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교를 택한 청년들이 벌써 5명이상이니 말입니다. 선교사명은 사명자의 삶으로 바꾸는 일이 될 것이라 여겨집니다. 세인 막에서의 하이티 청년들의 헌신을 보면서 느낀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박 목사님과 헤어져 세인트 막으로 가는 길 3시간의 이동 거리는 12시간이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슬픈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거리들, 마을과 마을을 지날 때마다 똑같은 환경, 똑같은 모습들 그런 것들이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입니다. 마을 타운이나 도시들 안은 쓰레기장 같은 모습들이 똑 같았다는 것입니다. 매연과 쓰레기 냄새들과 더러움에서도 어떻게 하든지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삶이 무슨 미래가 있을 것인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저 목사님과 대화하면서 그의 표현중 하나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요 너무 마음이 아파요 그래서 선교가 필요하고 선교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라는 말..이제는 아주 익숙해져서 불편함이 없는 것 같이 생활하시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분들 때문에 하이티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 여겨집니다.

세인막에 잘 곳이 없어 세인막 들어가기 전 호텔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입구에 늘어선 하얀 유엔군 차량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유엔지원군들이 묵을 수 있는 유일한 숙박시설이었습니다. 지난 내전으로 약 7000여명이 주둔하면서 반군들을 소탕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가운데 구호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약 3000여명으로 줄었다고 하는데 호텔에 들어서면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정말 저녁의 하이티의 해변은 아름다웠습니다. 복잡함도 없는 바다 저녁 석양의 붉은 바다는 가난의 하이티가 아니라 휴양지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시설은 좋지 않지만 하루를 안전하게 묵을 수 있다는 마음에 잠을 잘 잘 수가 있었습니다. 수요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세인 막 타운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도로마다 아스팔트가 파헤쳐져 운전하기가 어렵고 무조건 달리는 차량들의 위험함도 더욱 긴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미국의 노란 스클 버스들이 그렇게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 버스들은 학교 학생들을 위한 버스가 아니라 도시마다 운송객들을 운송해주는 버스였습니다. 미국의 공립학교 버스들이 다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버스가 설 때마다 스톱 싸인 보드가 열리는데 우리들은 차가 서야한다고 생각을 하면서 “서야지요?” 라고 말했더니만 한 선교사님이 웃으면서 '미국에서 준 버스들인데 버스 문을 열 때마다 스톱 싸인이 나오는 것은 때지 않고 달고 다는 것 같습니다. 그냥 가도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그냥 지나갔다가 벌금을 많이 물어야 하는 일이지만 전혀 벌금을 물어도 되지 않는 나라 그게 하이티였습니다. 하이티의 좋은 운송 수단이 된 것 같습니다.

세인 막 타운에 들어서기전 입구에 유엔군과 지방 경찰들이 검문소를 지나자마자 온 통 사람 투성인 타운 거리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종착지인 세인 막이었습니다. 수도에서 3시간 거리이지만 길이 나빠 적어도 5시간 이상이 걸려야 올 수 있는 해변의 조용한 도시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수도보다 더 좋은 환경을 가진 곳이 세인 막이었다는 것입니다. 지역 곳곳에 미국에서 개발을 위해 돕고 있다는 사인이었습니다. 이곳에 사역지를 처음세운 김용재 선교사님의 블로그에서 그분의 뜨거운 애정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지난 6월 28일에 동역자 한석민 선교사와 함께 작정한 교회 개척과 의료선교를 목적으로 미루었던 3차 선교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사무엘 전도사 가족을 비롯 15명의 하이티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하이티에서 첫 예배를 드리는 감격적인 순간을 주님께서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장소는 그동안 사무엘 전도사가 보아 두었던 곳인데 건물의 일층만을 이번에 3년 장기 임대계약으로 맺었습니다. 원래 일 년에 3천 불을 요구하던 장소를 2천 2백 불로 내려주는 대신 3년 치를 일시 불을 선금으로 달라고 요구하여 우선 마련해간 3300불만을 지불하고 나머지는 8월 중순까지 지불할 것을 약속하고 계약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이 건물 전체를 사용할 수 있게, 그리고 장차 우리 것이 되어 하이티 사역의 본부로 마음껏 사용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허락하시기를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설교 본문이며 제가 하이티 사역을 위해 받은 말씀인 성경귀절을 선교보고 머리에 적었습니다. 설 교중 빌립보서 4장 13절을 또한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예배 하루 전에는 바로 그 장소에서 환자 30명 정도를 치료할 수 있는 기회를 주님께서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Blokhauss 동네 주민 8천여 명에게 가까이 다가 갈 수 있는 의료선교의 첫 장을 열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김용재 선교사님의 마음을 엿 볼 수 있었던 글이었습니다.

세인막의 후리덤 센터를 돌아보고 가져온 티셔츠를 같이 입어보고 센터의 스탭들과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작은 것이지만 주는 기쁨이란 대단한 것이라 믿습니다. 주님이 말씀한대로 받는 것보단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가진 것 중 일부를 나누어줄 수 있는 마음들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이를 위해서 뒤에서 도와주신 성도의 마음을 하나님은 사랑하실 것이라 여겨집니다. 센터를 위해서 사역을 돕는 가정과 형제들 그리고 스태프들. 그들은 하이티에서 대학을 나와 같이 센터 스탭들로 컴퓨터 사역을 위해 돕고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세인 막의 복음을 심기 위한 그들의 모습에서 하이티가 복음으로 열려질 것입니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여 졸업한 필립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일하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도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신학을 공부한다고 합니다.

그런 젊은이들을 키우는 신학교도 세울 계획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약 10여명이 젊은이들로 인해서 불록하우스라는 달동네에 젊은이들을 키워갈때 이들이 가난에 찌들고 마약에 찌든 세인막의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주님을 통해 민족을 위해 헌신할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라 여겨집니다.

함께 동행했던 다니엘 차박사님이 감동이 오셨는지 가지고 오신 여비를 다 털어 음향시설을 설치하는데 기부하셨습니다. 70이 넘으신 분의 마음이 아름다워 보이십니다.
▲선교팀은 소정의 선교기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왼쪽이 다니엘 차 교회


우리가 온다고 모여진 스탭들의 얼굴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컴퓨터 교실을 위해 쓰던 노트북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음에 올 땐 쓰지 않은 노트북을 들고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앞으로 한 20여대의 노트북을 들고 올 계획을 가져 보았습니다. 오히려 들고 오는 것이 안전하고 세관 검사에도 무난할 것이라 여겨 미국에 돌아가면 그 일부터 해야 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산동네를 돌아보고 샘 전도사의 작은 아버지가 사역하시는 언덕위에 세워진 교회를 가보았습니다. 교회 안에 사립 국민학교를 운영하고 있는데 약 4학급으로 나누어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작은 건물 안에 칸막이를 했지만 칸막이가 아니라 그저 구분만 되어져 교실 안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제복들을 입고 조용히 앉아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았는데 손님들이 왔다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일어나 모두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깨끗한 얼굴들 예배드릴 때도 정장을 하고 와서 예배드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배의 귀중함을 가르쳐 주는 교회의 모습들이 좋아 보였습니다.

오후 3시 반 비행기로 도미니카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어 오래 지체할 수 없이 다시 작은 렌터카에 몸을 싣고 비행장으로 돌아 왔습니다. 여전히 거리는 변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다시 수도의 거리는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했고 비행기 에서 내려다본 하이티는 미국의 풍경과 전혀 다른 것이 없이 보였습니다. 평온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겨진 온갖 어려움들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세인막에 대한 기도가 필요하고 그곳엔 한국인으로 처음 들어가게 되었고 한국 사람을 처음 본다는 그들의 말에 후리덤 센터가 한국인을 통해서 세인막을 변화시키는 사역이 시작이 되었으면 하는 바랍니다. 지역의 교회들의 목사님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감사하고 단기선교팀이나 선교지 방문을 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적극 협력하고 도와주시겠다는 그들의 이야기에 힘을 가집니다.

세인막을 위해서 같이 동역하시는 김용재 선교사님 그리고 한석민 선교사님의 사역을 위해 같이 기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하이티 세인막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기도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이티에 관심을 가지는 평신도 성도들의 마음을 기다려 봅니다.

한국인이 처음 들어간 세인 막 그곳이 수도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위험을 안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음이 꼭 들어가야 할 곳이라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하이티를 위한 선교전략을 위해 평신도중심으로 하이티 미주 선교후원회를 설립할 계획입니다. 이를 위해 2월 첫 주에 김용재 선교사와 한석민 선교팀이 미주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김용재 선교사 연락처 DANNYKIM3@HOTMAIL.COM
한석민 선교사 연락처 jmbhan@aol.com
홍명철 목사 연락처 paulhong0102@ms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