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눈이 멀고 한 손이 없고 한 쪽 귀 마저 들리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더구나 6·25전쟁 중에 이데올로기 대립이 한창이던 시기에 사상적 오해를 받아 비참하게 부모마저 잃고 고아로 살아야 했던 사람이라면 세상에 대한 분노는 가득차고도 남을 것이다.

대구 광명학교 교장이면서 한국장애인소리예술단장인 황재환 전도사가 3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유엔본부와 카네기홀에서 펼쳐진 연주회를 위해 뉴욕을 찾았다. 황전도사는 한국을 대표해 이곳을 방문했으며, 두 번 연주회를 통해 8개국 장애를 가진 음악인은 아름다운 하모니를 선보여 관객의 큰 박수를 보냈다.

황 전도사는 뉴저지 2개 교회 간증집회에 이어 지난 7일(금) 뉴욕목양장로교회(담임 송병기 목사)에서 간증집회를 가졌다.

강화도 섬마을에서 7개 독자로 태어났던 그는 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고 돌봐주는 사람이 전혀 없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남의 집 쓰레기통을 뒤지며 살아야만 했다. 그렇게 돼지 먹이통 음식물까지 먹으며 배고픔을 채우다가 7살 때 또 한 번 시련이 닥쳐왔다. 당시 어린아이가 흔히 그랬듯이 불발탄을 보물이라도 된 듯 만지고 놀다가 폭발하는 바람에 시력을 잃게 된 것. 한 쪽 팔도 폭발로 사라지고, 한 쪽 귀 고막도 잃었다. 정말 순식간에 그는 흙더미와 함께 장애인 굴레를 덮어쓰게 됐다.

섬 마을에 병원이 없었고 한밤중에 일어난 일에 3시간 배를 타고 나가는 것이 힘들었을 뿐더러 애써 살려보려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버림받은 인생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동정 아닌 동정을 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마을 주민은 거적으로 그를 덮어 버렸지만,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지역을 정찰하던 미군 헬기가 날아와 피투성이가 된 그 작은 몸뚱이를 들쳐 업고 미군병원으로 이송한 것이다.

7개월 동안 극진한 간호를 받고 질긴 목숨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다. 그 후 고아원(영생원)으로 보내져 그곳 원장 끈질긴 권유로 신앙을 갖게 됐다. "나의 현실에 비참해 하며 세상과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먹고 자는데 문제는 없었지만 고아원 아이의 놀림에 더욱 상처가 됐었죠. 그런 상태에서 교회 나가라는 이야기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 눈이 밝아진다'는 원장 선생님 말에 정말 눈이 떠질 것만 같았습니다"

이에 황 전도사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혼자 어렵게 중앙감리교회를 찾아가게 된다. 그것은 두 번 째 기적으로 들어가는 문이 됐다. 권사와 집사 무릎에 앉아 그들이 들려주는 찬양과 성경이야기에 차츰 분노와 외로움이 사라져갔다. 점차 삶에 대한 생각도 긍정적으로 변했다. 이후 그는 10살 때 미군 목사가 전국에 유일하게 하나 밖에 없었던 대구 맹아학교로 보내 초·중·고등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게 혼자만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친구들과 부대끼며 지내다가 방학이 되면 갈 곳이 없는 그에게 너무나 큰 외로움으로 다가오곤 했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예민한 사춘기 때 그는 자신 삶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됐다. 무엇을 하고 살아갈 것인가? 흔히 하는 점술가가 되자니 신앙이 허락치 않았고 안마사가 되자니 한 손이 없어서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엄청난 비극이 주인공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며 몸뚱이 하나 뎅그러니 남은 작은 가슴을 덮쳐왔다. 기가 막히고 원통함에 하나님을 원망했다.

“나와 무슨 원수졌습니까? 무엇 때문에 다 데려가고 눈도 빼고 팔까지 없앴습니까”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 했다. 그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피아노를 치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60년대 먹고 살기에 힘든 시기에 피아노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피아노를 치라고 하시니…….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응답이라고 믿고 피아노를 칠 것을 결심하나 마음이 기뻐 날아갈 듯 했습니다"고 회상한다.

친구와 선생님에게 피아노를 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두들 비웃으며 그를 조롱했다. 대견스럽게 생각해줄 것이라 생각하고 찾아갔던, 자신을 누구보다도 이해해 주던 교장선생님도 반대했다. "너 두 눈도 안 보이제. 너 한 팔도 없제. 너 정신까지 이상해지면 어쩌려고 그러오." 그는 테이블을 뒤집어 던져버리고 복도에 나와 엉엉 울었다.

그날 이후, 3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밤마다 학교 기숙사 음악실을 찾아 하나님을 선생님 삼아 피아노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전혀 음악 같지 않은 소음이 시간이 갈수록 완벽한 화음으로 변해갔다. 주변 사람은 물론 자신도 놀랐다.

그의 인생에 대한 도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학을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주위 사람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헌책을 구입해 당시 60년대는 점자 교과서가 없었기에 사람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하며 공부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공부해 마침내 4년 전액 장학생으로 대구대 특수교육학과에 합격했다. 혼자서 밥해 먹고 빨래하고,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졸업장을 받았다. 졸업 후 모교인 대구 광명학교 교사가 됐다. 내친김에 대학원도 마치고 신학교를 졸업했다. 상담 자격증도 받았고 특수교육음악교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그는 학생에게 학문만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의 삶을 통해 희망을 가르친다. “눈 없고 손 없이도 나는 음악을 했는데 나보다는 멀쩡한 너희가 무엇인들 할 수 없겠느냐”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절규로 그는 희망을 전한다. 아니 그의 삶 자체가 제자에게 희망의 산 증거다.

시각장애를 딛고 음악박사가 돼 그의 진심어린 가르침에 화답해 주는 제자도 생겨났다. 20여 명이 넘는 전문 음악인이 탄생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많은 학생이 생활고를 못 이기고 음악적 재능을 중간에 접어야 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한 그는 장애인예술단을 만들어 그들 달란트를 살릴 수 있도록 했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도 만만치 않았다. “차라리 안마사 기술을 배우도록 하면 돈이나 벌지,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는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해낼 수 있었기에 제자도 보람 있는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인생은 살아갈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대부분 그의 제자로 구성된 한국장애인소리예술단은 정기연주회 외에도 불우이웃돕기, 소년소녀가장돕기연주회를 자주 한다. 남을 도우며 사는 삶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돈 한 푼도 없었던 내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배우게 허락하셨습니다. 할 수 있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과 함께 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고 강조하며 "하나님은 이제까지 버림받았던 장애인의 놀라운 찬양을 받을 것입니다. 내년에 정년퇴임하게 되는데, 퇴임 후 세계 선교를 계획하고 있습니다"고 기도를 부탁한다.

하나님 기적과 하나님 살아계심을 증명하는 그의 삶은 장애를 넘어선 모든 이에게 도전이 되고 희망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