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미션대학교 윤임상 교수
(Photo : 기독일보) 월드미션대학교 윤임상 교수

프랑스 출신의 폴 엘뤼아르 (Paul Eluard, 1895-1952) 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는 20세기 초 중반에 당시 유행하던 철학적 사조의 한 부류인 다다이즘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활동했습니다. 바로 이때 철학자들이나 시인들에 의해서 초현실주의적인 사상을 배경으로 다다이즘 이란 사상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다다이즘(Dadaism)은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 중 전쟁의 비극에 대한 증오와 냉소로 시작된 반 문명 반 합리주의 예술 운동으로 주로 스위스 취리히로 망명 온 작가들에 의해서 시작되어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전역으로 그리고 미국으로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다다” 라는 단어는 아무 의미 없는 말입니다. 이 말을 빌려 기존 질서와 합리성에 대한 파괴적인 도전을 통해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열게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이들은 주로 전쟁의 살육과 파괴에 대한 증오와 냉소를 기본 정신으로 삼아 모든 문화적 가치, 전통적 가치, 이성에 대한 신뢰를 부정하며 현존하는 모든 미적, 사회적 가치를 부인하는 운동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주 친한 친구에게 장미로 장식된 예쁜 십자가를 선물로 받았다고 합니다. 그 십자가 밑부분에는 “소망은 먼지를 일으키지 않는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굉장히 멋있는 말 같은 데 무슨 의미일까? 십자가 및 부분에 적혀 있으니 십자가와 상관이 있는 말일까? 의미를 알 것 같으면서도 애매해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 문장은 바로 폴 엘르아르 시인이 이 다다이즘의 철학적 견해에서 썼던 말입니다. “소망”이란 말이 들어있기에 뭔가 심오한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는 뜻임을 그가 발견하고는 그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폴 엘르아르와 비슷한 시기에 영국의 소설가요 성공회 평신도였던 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 ~ 1963) 를 우리가 잘 압니다. 그는 실제 1차 세계대전에도 참여했던 참전용사였습니다.

 그가 쓴 대표작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 나오는 한 문장을 액자에 담아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Christianity, if false, is of no importance, and if true, of infinity importance. The only thing it cannot be is moderately importance”
“기독교, 그것이 가짜라면 절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라면 영원히 중요할 것이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적당하게 중요하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이 문장에서 루이스는 기독교(Christianity)가 적당히 중요하지 않다는 말과 함께 명확성을 상기시키게 합니다. 20세기 초, 비슷한 시기에 너무나 다른 생각과 사상을 가지고 표현하는 두 부류의 사상가들을 비교해 보며 우리가 기독교에 대한 절대성에 대해 애매해하거나 추상적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근래에 만들어진 찬양 가운데 예수(I am He)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 곡은 현존하는 미국의 뛰어난 찬송 작가 로즈 아스피날(Rose Aspinall) 그리고 작곡가 메리 멕도널드(Mary McDonald)의 작품입니다. 이 짧은 곡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리고 복음의 절대성을 명확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누가 세상을 창조하고 바다를 잔잔케 했느냐? 처음과 나중이요 너희를 자유케 한 내가 곧 ( I am He) 예수이다.” 기적과 이사를 보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복음을 이루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 부활을 부활하신 자신이 되어 임마누엘이신 모통이 돌, 길과 진리요 생명이 되신 이가 자신임을 이야기합니다.

이 곡의 제목 “예수(I am He)”는 성경 요한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요 18;6)”저자 요한이 서술한 이 부분은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와 군대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이 함께 예수님을 잡으러 오는 장면입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이 ”내가 그니라 I am He” 라고 명확히 말합니다. 그분이 바로 사도 바울 선생님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복음의 절대성을 이야기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3-4)” 복음의 완성을 이루신 분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진리에 절대성을 부인하는 탈진실의 시대,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 개인화가 극에 달한 이 시대에 적어도 교회로 모인 공동체에서는 자신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모호해하거나 추상적이지 말아야 한다” 라고 이야기하는 노진준 목사님의 말에 깊은 동의가 됩니다.

이에, 기독교 복음은 변함없이 명료해야 합니다. 다다이즘에서 표현하는 “코끼리는 전염성이 강하다”, 혹은 “지구는 거무스름한 오렌지색이다” 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각자 느끼는 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모호한 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혹은 우리의 사역 속에서 형식에 의한 습관적 표현은 자칫 다다이즘처럼 애매한 것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깊이 명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시고 빌라도에게 고난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라는 복음에 진실성을 마음에 새기고 사는 사람들은 매 순간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를 실천할 수 있으며, 남을 먼저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조그마한 일에도 순종하며 최선을 다하고, 그리고 지속해서 사람의 평가보다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